[백색볼펜] 권투선수의 꿈
[백색볼펜] 권투선수의 꿈
  • 김상천 기자
  • 승인 2012.05.29 11:35
  • 호수 1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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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권투선수 동시에 누군가의 샌드백이다

◇ 10분만 더, 5분만 더. 심판의 카운트를 듣는 권투선수의 심정으로 알람 소리를 듣는다. 텐… 나인… 에잇… 링 위에 쓰러져 다음 라운드에 쓸 체력을 비축하는 권투선수처럼, 사각의 방안에 드러누워 있다. 일어날 수가, 없다. 너무 피곤하다. 이대로 오늘 하루 원 없이 잘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불을 말고 돌아누우며 생각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5분만 더 자자. 아직 괜찮아. 딱 5분만….

◇ 뭐야, 알람이 왜 안 울렸지? 반사적으로 튀어나가 세수를 한다. 면도를 하면서 방금 꾼 꿈 생각을 하다 아침부터 또 피를 봤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서둘러야지. 글러브가, 마우스피스가 어디 갔지? 링 위에 오르는 심정으로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긴다. 물 한잔 들이켜고 집을 나선다. 스텝스텝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로 향한다. 만원 지하철 속엔 손잡이마다 사람들이 샌드백처럼 매달려있다. 매달려서, 어제도 흠씬 얻어맞아 쑤시는 몸뚱이가 흔들린다. 모두가 권투선수이자 서로의 스파링파트너, 동시에 누군가의 샌드백이다. 자본주의와 전자기기와 청년실업에게 얻어맞기 위해, 샌드백을 가득 실은 10량 열차는 오늘도 달린다.

◇ 점심을 먹고 나면 탐색전은 끝난다. 난타전이 시작되면 아직도 나는 헷갈린다. 이것은 스포츠인가 아니면 폭력인가. 나는 도무지 룰을 이해하지 못한다. 급소를 얻어맞을 때도 심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귀라도, 물어뜯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때리면 맞는다. 그게 제일 편한 방법이다. 가드를 바짝 올리고 시계를 본다. 어서 공이 울리기만을 기다린다.

◇ 믿을 건 ‘한방’뿐이다. 참고, 참고, 또 참다가, 나는 언젠가 멋지게 한 방의 어퍼컷을 날릴 것이다. 모으고, 모으고, 또 모아서, 제대로 된 한방에 투자해 대박을 낼 것이다. 비굴하게 탬버린을 치고 맥주를 따르는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오은 날도 오겠지. 높으신 분의 요청으로 2411 들국화 사노라면을 찾으며 나는 혼자 생각한다. 바앍은 날도, 언젠가 올 것이다. 4533 김장훈, 9745 체리필터, 63318 크라잉넛, 64389 레이지본… 노래방 책자엔 사노라면이 많기도 하다. 원로가수 쟈니리가 왔으면 좋겠다던 좋은날 밝은날은 이제 인디밴드 레이지본이 꿈꾼다. 그래도 온다고 믿어야 한다. 온다. 올 것이다. 다시 도올고. 높으신 분 보다 더 높으신 분이 술 취해서 허공에 노래를 빽 지른다. 노래가 뒤섞인다. 사노라면 (다시 돌고) 언젠가는 (돌고) 바앍은 날도 오겠지 (도올고) 흐린 날도 (돌고) 날이 새면 (돌고) 해가 뜨지 않더냐. 10분… 9분… 8분…. 노래방 시간이 끝나고 골아떨어진 높으신 분들은 일어나지 못했다. 땡땡땡! 오늘의 경기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울린다.

※프로 데뷔전 32초만에 쓰러져 숨진 뉴질랜드 권투선수 윌리엄 로드리게스 고메스(29)를 추모합니다. <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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