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오도답파여행 31. 불국의 이상 <최종화>
新오도답파여행 31. 불국의 이상 <최종화>
  • 김재관 연구교수
  • 승인 2012.05.29 11:38
  • 호수 1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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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불국사의 역사를 읽었다”
▲ 아사달 아사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지와 경주 남산.

「오도답파여행」의 경주여행 부분(『매일신보』 연재 제목은 ‘徐羅伐에서’이다.)에서 흥미로운 것은 글과 함께 사진이 실렸다는 점이다. 총 53회의 「오도답파여행」 기사에서 경주 부분은 13회가 연재되었는데, 총 여덟 개의 지면에 열 컷의 사진이 실렸다. 이 중에서 다섯 컷은 불국사 전경, 다보탑, 석가탑, 석굴암 전경, 석굴암 석실 내부의 보현보살과 제석천을 담은 사진이었다.    

『매일신보』가 「오도답파여행」의 다른 지역과 달리 경주에서부터 사진을 싣기 시작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시기 경주가 일본제국주의의 문명적 우위를 과시하는 상징적인 장소였다는 점에서 『매일신보』의 의도를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는 있다. 1909년 소네 아라스케(曾    荒助) 통감의 경주 방문 이후 경주는 일본인들의 관광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경주와 다른 도시를 연결하기 위해 신작로가 만들어졌고, 경주 곳곳의 고분들이 조선총독부의 주도 하에 파헤쳐졌고, 석굴암을 위시한 몇몇 신라시대 유적들이 수리되었고, 경주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적에 대한 각종 조사보고서들이 출간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은 역사도시 경주에 대한 관심을 더욱 고조시켰다.

경주 시내를 떠난 이광수는 불국사 경내의 여인숙에서 “불국사의 역사를 읽었다”고 썼다. 그가 읽은 책은 도쿄제국대학의 교수였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와 야츠이 세이치(谷井濟一), 구리야마 순이치(栗山俊一)가 쓴 『朝鮮古蹟調査略報告』였을 것이다. 이광수가 불국사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인용한 세키노 다다시는 앞의 두 사람과 함께 『조선고적도보』 발간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부터 1935년까지 이십년 동안 열다섯 권의 분량으로 『조선고적도보』를 발간했는데, 이 책은 조선에 산재한 유물과 유적을 도록화한 조선 문화재의 아카이브였다.

이 중 통일신라시대의 유물과 유적을 정리한 4권과 5권이 1916년과 1917년에 각각 출간되었다. 4권은 불국사와 관련된 문화재들을 다수 수록했고, 5권은 수리가 끝난 석굴암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담았다. 그런데 『매일신보』에 실린 사진들은 세키노 일행이 촬영하여 『조선고적도보』에 수록한 것이었다.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고고학적 성과를 이광수의 「오도답파여행」에 삽입하여 이 신문의 조선어 독자들에게 선전하고자 했다.

고고학적 지식이 일천했던 이광수는 이를 비판적으로 검증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그는 석굴암과 불국사 등의 문화재를 설명하면서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불국사 대웅전 앞의 석등의 명칭을 ‘카스가도로(春日燈籠)’라 썼는데, 이는 일본의 석등을 일컫는 용어였다. 또한 석가탑과 다보탑은 기단(基壇)까지 포함하여 각각 오층탑이라고 쓰고 있다. 더 나아가 역사적 인식에서도 문제를 드러낸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파괴된 불국사의 유적을 씁쓸하게 바라보다가,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왜군의 ‘假我途(길을 빌리자)’에 ‘假途難(길을 빌려줄 수 없다)’으로 대응하지 않았다면’하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의 발언은 우수한 문화유산을 잃은 슬픔을 표현하려는 것이었지만, 국가를 빼앗긴 식민지인들의 자의식을 자극할 수 있는 발언이기도 했다. 이광수는 자신의 역사적 지식이 박약하다고 느꼈는지「오도답파여행」의 연재를 끝내면서 “역사적으로나 아직 안식이 없는 나로서 이 글을 썼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적었다.  

그렇지만 작은 이야기를 가공하는 그의 문학적 상상력은 뛰어 났다. 그는 불국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과 이를 주도했던 ‘김대성’의 ‘신고정진(辛苦精進)’의 산물인 불국사와 석굴암, ‘아사녀’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영지(影池)’를 하나의 연상체계로 묶는다. 이광수는 이 글에서 ‘아사녀’의 연모 대상으로 ‘김대성’을 적고 있다. 이 전설은 현진건의 『무영탑』에 등장하는 백제의 석공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와 다르다. 그럼에도 두 이야기의 결론은 석가탑으로 상징되는 불법을 이룰 때까지 개인의 욕망을 이겨내고 승화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것은 불국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희생이기도 했다.

후일, 이광수는 1935년 『조선일보』에 『이차돈의 사』를 연재하고, 1942년 『매일신보』에 『원효대사』를 연재하면서 ‘신라’를 다시 불러온다. 1917년 경주를 떠나며 ‘역사적 안식을 키우는 수년 후면 아주 잘 쓸 것 같다’고 다짐했던 이광수의 바람이 실현되었는지는 좀 더 생각해 볼 일이다.


<연재를 마치며>
2011년 3월 3일, 이광수의 「오도답파여행」의 여정을 따라 가기 위해 서울역을 출발했다. 그가 지나갔던 시간으로부터 아흔네 해가 지난 시점에서 다시 다섯 개 도를 따라가는 여행은 쉽지 않았다. 그가 했던 것처럼 오로지 두 달 동안 여행만 할 수도 없었기에 서울을 떠났다가 집으로 회귀하기를 아홉 번이나 해야 했다. 이광수가 당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했듯이 나도 이 과정에서 각종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했다. 천천히 여유를 갖고 움직이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여행은 항상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여행을 하는 동안 이광수가 제안했던 근대 사회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산업 구조, 교통체계, 교육현실, 도시, 숲과 강 등이 변하고, 그 변화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근대 이후 증식되기 시작한 사람들의 욕망은 형태만 달리 한 채 우리들의 의식을 관통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에 길들여지고, 공동체의 연대감이 약화되면서 허위와 탐욕으로 증식되는 개인화만이 백여 년의 세월 동안 단절되지 않고 이루어진 셈이다.

2011년 3월 15일부터 <신오도답파여행>을 연재하면서 몇 번에 걸쳐 글의 논조를 바꾸어 보려고 노력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광수가 연재를 마치면서 했던 말을 여기서 다시 써야겠다. ‘역사적 안식을 키우면 더욱 잘 쓸 것 같다.’ 

김재관 연구교수
김재관 연구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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