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每日申報, 抗日思想을 고취하다
大韓每日申報, 抗日思想을 고취하다
  • 권용우(명예교수·법학)
  • 승인 2012.06.08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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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每日申報, 抗日思想을 고취하다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1904년 7월, 양기탁(梁起鐸)이 영국인 베델(Bethell, E. T., 한국명 : 裵 說)과 더불어 국한문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였다. 우리 동포들의 가슴에 항일애국사상(抗日愛國思想)을 심어주려는 목적에서였다.

 

救國의 길에 들어서다

 

한말(韓末) 쇄국(鎖國)에서 개국(開國)으로 이어지는 격변기(激變期)에 태어난 양기탁은 성장하면서 외세(外勢)가 무섭게 밀려오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미국 군함(軍艦)의 강화도(江華島) 내습, 러시아의 통상요구(通商要求), 청(淸) 나라 군대에 의한 대원군(大院君)의 납치, 을미사변(乙未事變), 아관파천(俄館播遷) 등의 일련의 사건들, 그리고 친미파(親美派) ‧ 친러파(親露派) ‧ 친일파(親日派)가 서로 갈등하고 어제의 친미파가 오늘은 친러파로 옷을 갈아입는 행태를 바라보면서 양기탁은 구국(救國)의 큰 뜻을 품게 된다.

 

그는 기울어져가는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고향을 뒤로 하고, 서울로 올라와 각계 인사들과 교류를 시작한다. 그리고, 일본을 여행하면서 선진문물(先進文物)을 접하고,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

이 때, 양기탁과 종군기자(從軍記者) 베델의 만남은 우리 나라 역사에 하나의 전기(轉機)를 마련하게 된다.

베델은 영국 런던 「데일리 뉴스」(Daily News)의 특파원으로서 러 ‧ 일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입국하였는데, 이 때 고종황제(高宗皇帝)의 통변인 양기탁과 조우하게 된다.

이 무렵에는 일본 군대가 서울에 많이 주둔해 있었고, 일본인들은 그들의 군대의 힘을 빌어 한국 국민들에 대하여 대단히 위압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집회가 엄격하게 통제되었고, 언론에 대한 검열이 몹시 심했다.

 

이 때, 양기탁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영감(靈感)이 있었다. 베델과의 합작품을 만들어 기울어가는 조국에 횟불을 드높히는 일이었다. 이로써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탄생한 것이었다.

 

同胞의 가슴에 抗日思想을 심다

 

1904년 7월 18일. 이 날은 항일애국사상을 동포의 가슴에 심어주던 대한매일신보가 이 땅에 창간된 날이다. 주한일본 헌병사령부가 사전검열을 실시함으로써 우리의 언론자유는 송두리째 박탈되고 없었다. 이 같은 절박한 상황하에서 새로운 신문의 창간은 별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양기탁과 베델의 합작품인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언론탄압을 피해갈 수가 있었다. 영국인 베델을 사장으로 추대한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자유로운 논조를 펼 수 있었다. 이로써, 대한매일신보는 억눌린 한국 국민들에게 희망이요, 정신적 지주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6면을 발행하면서, 그 중 2면은 한글판이었고, 4면은 영문판이었다. 이듬 해 8월 11일부터는 국한문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두 개의 신문으로 발행하였는데, 영문판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였다. 그러다가, 한글과 한문을 혼용한 국한문판을 읽지 못하는 독자가 있다는 불만이 일게 됨에, 1907년 5월 23일부터는 한글판을 별도로 발행하여 국한문판 ‧ 한글판, 그리고 영문판의 3종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나날이 사세(社勢)가 확장되어 3종의 신문을 합한 발행부수가 1만부를 넘었다고 하니, 그 당시의 최대의 신문이었다(동아원색대백과사전 5권). 이 때, 논설진으로서는 양기탁을 비롯해서 남궁억(南宮檍) ‧ 박은식(朴殷植) ‧ 신채호(申采浩) 등 당대의 쟁쟁한 논객들이었는데, 이들의 날카로운 논설이 우리 동포들의 가슴에 찡하게 다가갔다.

 

이로써 대한매일신보는 황성신문(皇城新聞)과 함께 애국적 투쟁을 고무하는 항일언론(抗日言論)으로 자리를 굳건히 했다. 그래서, 이 두 신문이 불을 토하는 듯한 논설로 일본의 침략주의를 공격하면 우리 국민 모두가 만족한 웃음을 머금곤 했다고 한다.

조선 통감(統監)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이러한 언론의 기세를 꺾으려는 목적으로 경성일보(京城日報)를 창간하여 일본어판과 한국어판을 함께 발행했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법률(法律)의 힘은 위대하다. 그러나, 필봉(筆鋒)의 힘은 더욱 위대하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Goethe, J. W. von : 1749 ~ 1832)의 말이다. 마치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을 두고 한 말인 듯 하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일본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체결되자 대한매일신보는 “칙어엄정”(勅語嚴正) 과 “칙약무효”(勅約無效)라는 사설로, 황성신문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로 일본의 침략을 가차없이 꾸짖었다.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도 적극적이었다. 1907년 2월, 이완용(李完用) 내각이 일본으로부터 빌린 국채 1,300만원을 갚기 위하여 2천만 국민이 담배를 끊고 절약한 돈으로 이를 갚자는 민중운동이 발의되었을 때,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國債報償支援金 總合所)를 대한매일신보사에 두고 전국 각지로부터의 지원금을 수납하였다. 이 때, 양기탁이 총무로 추대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제(日帝)의 탄압으로 사장 베델이 수차레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고, 이로 말미암아 1908년 5월에는 사장이 영국인 만함(Marnham, A. W.)으로 바뀌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1909년 베델의 죽음은 대한매일신보의 통한(痛恨)이었다. 그는 “나는 죽더라도 신문만은 오래 살려 한국 동포를 구원해야 한다.” 이는 37세의 젊은 나이로 불귀(不歸)의 객(客)으로 돌아가는 베델의 간절한 바램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베델의 대한제국(大韓帝國)을 향한 마지막 바램을 기억하면서 1910년 한일병방(韓日倂合)이 될 때까지 민족진영의 대변자(代辯者) 역할을 이어갔다. 아! 위대한 그 이름, 대한매일신보여!

권용우(명예교수·법학)
권용우(명예교수·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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