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에 목을 놓아 痛哭하노라
이 날에 목을 놓아 痛哭하노라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08.06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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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에 목을 놓아 痛哭하노라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이 날에 목을 놓아 통곡(痛哭)하노라.’ 이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자 황성신문(皇城新聞) 사장 겸 주필인 위암(韋菴) 장지연(張志淵)이 이 조약을 비방하는 사설(社說)의 제목이다.

 

乙巳五賊을 향한 욕설 빗발치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나라의 명운(命運)은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일본은 한국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통감(統監)에 의한 내정간섭(內政干涉)을 노골화하였다. 우리의 외교권(外交權)도 빼앗아갔다. 나라가 있었지만, 그저 껍떼기만 있었을 뿐이었다. 이런 원통한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을사5적(乙巳五賊)을 향한 욕설이 여기 저기서 빗발치듯 하였다. 이지용(李址鎔) ‧ 이근택(李根澤) ‧ 박제순(朴齊純) ‧ 이완용(李完用) ‧ 권중현(權重顯). 이들이 누구든가. 대신(大臣)이란 이름으로 국록(國祿)을 받아 먹으면서 백성들 위에 군림하던 자들이 아니던가. 어제는 청국(淸國)이나 러시아에, 또 오늘은 일본에 빌 붙어 출세한 자들이 아닌가. 그들에게는 나라의 장래 따위는 안중(眼中)에 없었다. 오직 눈앞의 자신의 부귀(富貴)와 평안(平安)이 있을 뿐이었다.

의정부(議政府) 참찬(參贊) 이상설(李相卨)의 “저들 도적을 참수시켜 국민에게 사죄하라”는 상소(上疏)도, 전 의정대신(議政大臣) 조병세(趙秉世)의 매국5적(賣國五賊)을 통박하는 상소도 그저 한낱 종이쪽일 뿐이었다. 종1품(從一品) 이유승(李裕承) ‧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 ‧ 법부주사(法部主事) 안변찬(安秉讚) ‧ 전 참찬(參贊) 최익현(崔益鉉) ‧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 이근명(李根命) ‧ 승지(承旨) 이석종(李奭鍾)의 상소도 허공에 메아리되고 말았구나!

 

온 국민이 울분을 터트리고, 상인(商人)들은 상가(商街)를 철시하고 생업(生業)을 접었다. 각급 학교도 모조리 교문을 닫았다. 지방의 유생(儒生)들이 상경하여 상소(上疏)로써 조약의 폐기를 부르짖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병(抗日義兵)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아, 슬프다! 국민 된 자 누가 울지 않았으랴! 숱한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이 순국(殉國)으로 항거하였지만, 일제(日帝)의 야욕을 막을 길이 없었다.

 

오호라, 찢어질 듯한 마음이여!

 

“지난 번에 이또오(伊藤博文)가 한국에 오매 우리 인민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또오는 동양 3국(東洋三國)이 정립(鼎立)하여 안녕하기를 맡아 주선하던 인물이니 이번에 한국을 찾아옴도 반드시 우리나라 독립을 공고히 할 방략을 권고하리라 하여 관민(官民) 상하가 그를 환영하였더니, 천하(天下)의 일은 미리 예측하기 어렵도다. 천만 뜻밖에도 5조약(五條約)을 어떤 연유로 제출하였는고? 이 조약은 비단 우리나라만 아니라 동양 3국이 분열하는 조짐을 나타낸 것인즉, 이또오의 본뜻이 어디에 있는가? ‧ ‧ ‧ ‧ ‧

아아, 개 ‧ 돼지 새끼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大臣)이라는 것들이 영리에 어둡고 위협에 억눌린 채 이에 따르고, 굽실거리며 나라를 팔아먹은 적(敵)이 되기를 서슴지 않았으니 4천년 강토와 5백년 종사(宗社)를 남에게 바치고 2천만 생령(生靈)들을 남의 노예로 만들었다. 저들 개 ‧ 돼지 새끼만도 못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및 각 대신들은 족히 책망할 여지도 없으려니와 참정대신(參政大臣)이라는 자는 정부의 우두머리이면서 겨우 부자(否字)로 책임을 면하여 이름만이라도 남기고자 꾀하였는가. ‧ ‧ ‧ ‧ ‧

오호라! 찢어질 듯한 마음이여! 단군(檀君) ‧ 기자(箕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졸연히 멸망하고 말았구나. 아프고 아프도다. 동포여, 동포여!”

 

이는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발표된 사설 ‘是日也放聲大哭’(이 날에 목을 놓아 통곡하노라)의 일부이다. 이로써 일본인(日本人)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이 얼마나 통쾌한 부르짖음인가. 일본의 간악한 흉계(凶計)를 통박하고, 그 사실을 온 천하에 폭로한 명문(名文)이 아니었던가. 어디 그 뿐인가. 조정(朝廷) 대신들을 향한 칼날 같은 꾸짖음, 이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또, 누가 통곡하지 않았겠는가.

 

장지연의 필봉(筆鋒)을 누가 꺾으랴.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가 일본에 병탄(倂呑)되자 진주(晋州) 경남일보(慶南日報) 주필 장지연은 황 현(黃玹)의 절명시(絶命詩)를 게재한다.

 

“난리를 겪다 보니 머리가 희어졌구나 /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 했건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도다 /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 가물거리는 촛불만 푸른 하늘을 비추네”

 

이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그 분함을 억누를 길이 없어 매천(梅泉) 황 현이 음독자결하면서 남긴 칠언절구(七言絶句) 4수(首) 중의 제1수이다. 이것이 어찌 매천만의 심정이었겠는가.

망국(亡國)에 대한 2천만 우리 동포 모두의 슬픔을 담고 있는 절규(絶叫)가 아니었겠는가. “새 짐승이 슬피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 무궁화 세상이 이제 망해버렸구나 / ‧ ‧ ‧ ‧ ‧.

장지연의 붓 끝에 담은 매천의 졀규가 아직도 우리의 귓가를 때리고 있구나!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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