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또오(伊藤)의 가슴에 銃을 겨누다
이또오(伊藤)의 가슴에 銃을 겨누다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08.20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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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또오(伊藤)의 가슴에 銃을 겨누다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1909년 10월 26일. 이 날은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가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元兇)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날이다.

    안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읍(海州邑)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두 살 때 신천군(信川郡) 두라면(斗羅面)으로 이사해서 이 곳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이 곳은 산수(山水)와 풍광(風光)이 아름다운 천봉산(天峰山) 밑 청계동(淸溪洞)이었다. 이 곳에서 소년시절을 보내면서 이웃의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는데, 재주가 출중하고 말타기와 활쓰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射擊에도 명수였던 少年 安重根

  「백범일지」(白凡逸志)에 이렇게 적고 있다. “그 때에 안 진사(進士)의 맏아들 중근은 열 세살로서 상투를 짜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자주 수건으로 질끈 동이고 돔방총이라는 짧은 총을 메고 날마다 사냥을 일삼고 있었다. 보기에도 영기가 발발하고 청계동 군사들 중에 사격술이 제일이었다. 짐승이나 새나 그가 겨눈 것은 놓치는 일이 없기로 유명하였다.”

    그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책 읽기에도 열심이었는데, 소년시절에 이미 사서(四書)를 통독했다고 한다. “중근이 둘째 정근(定根), 셋째 공근(恭根)과 함께 글을 읽고 있을 때 아버지 안 진사는 둘째와 셋째 아들에게 대하여서는 글을 아니 읽는다고 걱정도 하였으나, 중근에게 대하여서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백범일지」에서).

    수천 석(石)을 추수하는 큰 부잣집 장남으로 태어난 안중근의 소년시절은 평탄한 삶이었고, 열일곱 살 되던 해에는 천주교(天主敎)에 입교해 세례(洗禮)를 받았다. ‘도마’가 그의 세례명이다.

    그런데, 을미사변(乙未事變) ‧ 아관파천(俄館播遷) ‧ 황국협회(皇國協會)의 만민공동회(萬國共同會) 습격 ‧ 독립신문(獨立新聞)의 폐간 ‧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의 체결 등의 일련의 사건들은 안중근으로 하여금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 라는 자기성찰을 하게 했다. 더욱이, 그는 ‘보호라는 이름’의 을사조약으로 침략의 단계를 밟아가는 일본의 야욕을 지켜보면서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全 生涯를 고스란히 祖國에 바치다

    청년 안중근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헤이그(Hague) 밀사사건(密使事件)으로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退位)되고, 우리 군대가 해산 당한 1907년의 일이었다.

    그는 더 이상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의병(義兵)을 모아 일본과 무력으로 싸울 계획을 세우고, 연해주(沿海州)로 망명(亡命)의 길에 오른다. 그는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 등을 오가면서 동지(同志) 11명과 혈맹(血盟)을 맺고, 그들을 중심으로 항일투쟁(抗日鬪爭)의 방략을 모색해 나갔다.

    1908년, 안중근은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중책을 맡게 된다. 그리고, 6월 독립군 3백명을 이끌고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경흥(慶興)에 주둔한 일본군과 세 차례에 걸친 교전(交戰)을 벌여 50여명을 사살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회령(會寧)까지 진격하여 일본군 병영(兵營)을 기습했다. 그러나,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적(敵)의 포위망을 뚫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1909년 10월 22일, 블라디보스톡에 머물고 있는 안중근은 요동보(遼東報)의 1면 톱기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 기사인 즉, 이또오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체프(Kokotsev)와 동양(東洋)에 대한 현안(懸案)을 은밀히 협의하기 위해서 26일 만주 하얼빈역에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신문을 잡은 안중근의 손이 떨렸다. 그는 보던 신문을 손으로 움켜쥐고, 동지 우덕순(禹德淳) ‧ 조도선(曺道先) ‧ 유동하(劉東夏)를 급히 불렀다. 그리고, 이들은 이마를 마주했다. 절호의 기회를 놓지지 않고, 이또오를 사살할 계획을 세웠다.

 

    “장부(丈夫)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응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꼬

    동풍이 점점 참이여 장사의 의지가 뜨겁도다

    분개히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쥐도적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꼬

    어찌 이에 이를줄을 헤아렸으리오 사세가 고연하도다

    동포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만세 만만세 대한동포로다”

    이는 안중근이 이또오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동지들 앞에서 지은 ‘거사가’(擧事歌)이다. 그의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는 망명길에 오르는 순간부터 그의 전 생애를 조국에 바치기로 명세하지 않았던가.

    1909년 10월 26일, 이제 그 날이 찾아온 것이다. 안중근은 일본인으로 가장하고, 하얼빈역에 잠입한다. 이 날 청(淸) ‧ 러(露) 두 나라의 의장대(儀仗隊)가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정돈하고, 이또오를 맞았다. 곧 이어서 이또오가 거만한 모습으로 의장대의 사열(査閱)을 받고 있었다. 이 때, 이또오를 향해 요란한 총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그리고, 이또오는 피를 흘리면서 플랫포옴에 쓰러졌다. 허름한 외투차림에 도리우찌를 쓴 젊은 사나이가 한 손으로 권총을 휘두르며, ‘대한제국 만세!’를 외쳤다. 안중근이 그의 업(業)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그는 현장에서 러시아 경관에 의해 체포되고,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여순(旅順)의 일본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감옥에 수감된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또오의 절명(絶命)을 확인하고 나서 “천주님이여, 마침내 포학한 자는 죽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며, 울먹였다고 한다.

    1910년 2월, 여순감옥에 수감된 안중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死刑)이 선고되었고, 3월 26일 형(刑)이 집행되었다. 안중근은 다섯 달 동안 쓰라린 옥중생활(獄中生活)을 하면서 많은 유필(遺筆)을 남겼으며,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는 등 당당한 모습이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대한남아(大韓男兒)인가.

    문득, 독일의 작가 헤세(Hesse, H. : 1877 ~ 1962)가 남긴 “자기의 운명을 짊어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영웅이다”라는 명언(名言)이 머리를 스친다.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영웅, 안중근 의사! 두 손 모아 그의 명복(冥福)을 빈다.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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