亡國의 슬픔을 죽음으로 달래다
亡國의 슬픔을 죽음으로 달래다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08.28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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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國의 슬픔을 죽음으로 달래다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1905년 11월 30일. 이 날은 민영환(閔泳煥) 공(公)이 순국한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107년 전의 일이다.

    민 공은 1905년 11월 18일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자 전 의정대신(議政大臣)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토역(討逆) ‧ 파약(破約)할 것을 의논하고, 여러 애국지사들과 을사5적(乙巳五賊)의 처형과 조약의 폐기를 의논했다.

    11월 26일, 민영환은 조병세와 함께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 이근명(李根命)을 비롯한 이유승(李裕承) ‧ 이건하(李乾夏) ‧ 민영휘(閔泳徽) 등 백관(百官)을 이끌고 입궐하여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폐기를 주청했다.

    이에 더하여, 상소(上疏)도 이어갔다. 민영환이 소두(疏頭)가 되어 이근명 ‧ 전 참찬(參贊) 최익현(崔益鉉) ‧ 종묘제조(宗廟提調) 윤태흥(尹泰興) ‧ 법부주사(法部主事) 안병찬(安炳瓚) ‧ 승지(承旨) 이석종(李奭鍾) 등이 간곡한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들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버티어도 소용이 없었다. 참으로 황망한 심정이었다.

    민 공은 하는 수 없이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보고 되돌아나와 마지막으로 비장한 결심을 했다. 11월 30일 오전 6시. 기울어져 가는 국운(國運)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2천만 동포에게 이별을 고했다.

    죽음으로써 國恩에 보답하기로

      “아! 슬프다. 나라의 수치와 국민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민족은 장차 생존경쟁(生存競爭)에 진멸(盡滅)되고 말 것이다. 모름지기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한 사람은 도리어 살게 됨을 여러분들은 어찌 알지 못하는고? 영환(泳煥)은 이제 한 번 죽음으로써 황상(皇上)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형제들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그러나,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여러분들을 기어이 도우리니 우리 동포형제들은 더욱 분투 격려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 자유독립을 되찾는다면 죽은 몸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아,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이별을 고하노라!” 

    이는 민영환 공이 순국하면서 2천만 동포에게 남긴 유서이다. 이 얼마나 애절한가. 마디 마디마다 그의 애국충정과 동포애가 살아 숨쉬고 있다. 우리 민족의 자유독립을 바라는 그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민영환의 순국소식이 전해지자 온 국민들은 비탄에 빠졌다. 이상설(李相卨)은 종로(鐘路) 네거리에 뛰어나와 군중들을 향해 “민영환이 죽은 오늘이 바로 전 국민이 죽은 날이다.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민영환 한 사람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전 국민의 죽음 때문이다”라고 소리 높혀 연설하면서,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쳤다. 또, 조남승(趙南升)은 민영환의 유서를 낭독하고, 군중들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

    이것이 어찌 이상설 ‧ 조남승 두 사람만의 생각이었겠는가. 2천만 우리 동포 모두의 생각이요, 심정이었다. 1905년 11월 30일, 일제(日帝)를 향해 비수(匕首)를 뽑아들었다. 2천만 동포가 하나되는 날이었다.

    高宗皇帝도 친히 나와 哭送했다니! 

    “정충(精忠)일네, 정충일네, 우리 민공(閔公) 정충일네

     대절(大節)일네, 대절일네, 우리 민공 대절일네

     이 충성, 이 절개는 만고(萬古)에도 짝이 없네

     빛이 나네, 빛이 나네, 대한 산천(大韓 山川) 빛이 나네

     -중 략-

     독립일세, 독립일세, 대한제국(大韓帝國) 독립일세

     자유로세, 자유로세, 2천만(二千萬民) 자유로세

     이 독립, 이 자유는 우리 민공의 공이로다

     공이로다, 공이로다, 피흘리신 공이로다”

    이는 민 공의 예장(禮葬)이 지나가는 길에 젊은 학생들이 뒤따르며 부르던 노래의 일부이다. 민영환 공의 애국충정이 젊은 학생들의 가슴에 와닿았으리라. 그 때 그 모습이 눈에 어린다.

    전국의 백성들이 일손을 놓고 소리 높혀 통곡했다고 하지 않는가. 어디 백성들 뿐이었던가. 민 공의 영여(靈與)가 대한문(大韓門)에 이르렀을 때에 고종황제(高宗皇帝)도 친히 나와 곡하며, 마지막 그를 작별했다고 한다.

    민영환! 그는 당대 제일의 권문세가(權門勢家) 출신으로서, 모든 관직과 명예를 벗어던지고 망국(亡國)의 슬픔을 죽음으로써 달랬다.

    민영환의 장렬한 죽음을 생각하면서,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학자(儒學者) 순자(荀子 : BC. 298? ~ 238?)의 명언을 떠올리게 된다. “안으로 백성을 통솔할 능력이 있고 밖으로 외적(外敵)을 물리칠 능력이 있으며, 동료들의 신임을 받으면서 군주(君主)에 대해서는 충절(忠節)을 지키고 백성을 사랑할 줄 아는 자가 바로 공신(公臣)이다.”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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