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의 음식인문학 18. 진은영의 「멸치의 아이러니」와 멸치
김주언의 음식인문학 18. 진은영의 「멸치의 아이러니」와 멸치
  • 김주언(교양기초교육원) 강의전담교수
  • 승인 2012.09.04 17:58
  • 호수 13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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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 사소하거나 위대한
멸치가 싫다
그것은 작고 비리고 시시하게 반짝인다

 

시를 쓰면서
멸치가 더 싫어졌다
안 먹겠다
절대 안 먹겠다
(…)
대학에 입학하자 나는 거룩하고 순수한 음식에 대해
밥상머리에서 몇 달간 떠들기 시작했다
문학과 정치, 영혼과 노동, 해방에 대하여, 뛰어넘을 수 없는 반찬칸과 같은 생물들에 대하여
잠자코 듣고만 계시던 어머니 결국 한 말씀 하셨습니다
“멸치도 안 먹는 년이 무슨 노동해방이냐”
                                       ―진은영,「멸치의 아이러니」 중에서

 그렇다면 이제부터 멸치를 먹을 것인가. 진은영의 시는 우리에게 멸치의 ‘아이러니’를 읽으라고 요구한다. 표면적인 진술 이면에서 반란과 모험을 꿈꾸는 것이 시어의 생리이지만, 특히 ‘아이러니’가 제목으로 노골화되어 있는 마당에 표면적인 진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즉, 멸치는 “작고 비리고 시시하게 반짝”이는 게 아니며, “안 먹겠다/절대 안 먹겠다”는 진술은 어금니에 힘을 주고 하는 부정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기껏 반찬 투정이나 하며 하찮은 것도 어쩌지 못하는 주제에 거창한 것을 도모하는 자기모순의 폭로를 쿨한 장난기 속에서 읽을 일이다.

 멸치도 생선이냐고 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사실 알고보면 멸치만큼 괜찮은 생선도 드물다. 생선 가운데 사람 몸에 가장 좋은 생선은 머리부터 꼬리까지 통째로 먹을 수 있는 생선이라고 하는데, 잔멸치가 바로 그렇다. 또, 멸치는 죽방렴 멸치처럼 고급 멸치가 따로 있기는 하지만 일반 서민 누구나에게 쉽게 접근이 허락되어 있는, 양식 아닌 자연산 어류가 바로 멸치이기도 하다.『멸치』의 작가 김주영에 의하면 멸치는 이렇게 ‘위대’하기까지 하다:“고래가 멸치를 사냥하는데, 고래를 만난 멸치 떼는 질주를 멈추고 폭죽처럼 흩어졌다가 전열을 가다듬고 의연히 수중 발레를 벌인다. 그리고 물결을 이룬다. 목숨이 담보되고 말았는데도 비굴하거나 추악하지 않고 포식자를 향하여 매혹적인 군무를 보여 주는 어류는 멸치뿐이다. 물결을 이룬 아름다운 춤사위에 매료된 고래는 더욱 충동적으로 멸치를 사냥한다. 그러므로 멸치는 고래보다 더 크고 의젓하다.” 요컨대 척추동물인 멸치는 그래 봬도 나름 뼈대 있는 가문의 소생이다. 눈 뜬 채 말라빠진 어떤 멸치에게도, 어떤 멸치 미라에게도 저 잊지 못할 빛나는 대양의 추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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