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이 도도하게 흘러가니 물결이 마를소냐
강물이 도도하게 흘러가니 물결이 마를소냐
  • 김철웅 연구원
  • 승인 2012.09.04 21:45
  • 호수 13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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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이로(李魯)의 『용사일기(龍蛇日記)』
▲진주성 촉석루와 남강.


57. 이로(李魯)의 『용사일기(龍蛇日記)』


강물이 도도하게 흘러가니 물결이 마를소냐


 요즘 한·일 관계가 심상치 않다. 근원은 항상 일본에 있었다. 지금까지 일본은 동아시아의 가해자였다. 특히 한반도는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아왔다. 근대에는 조선의 멸망이 그렇고, 좀 멀게는 임진왜란이 그렇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을 공격해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조선은 이미 그 전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동태를 살핀 적이 있었다. 서인이었던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을 예측하고 대비책을 강구하여야 한다고 했으나, 동인에 속한 김성일은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것없고 전쟁 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엇갈린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상반된 주장은 정세 판단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렇듯 임진왜란의 발생 한가운데에 학봉 김성일(1538~1593)이 있다. 김성일에게는 ‘당파의 입장 때문에 오판을 부르고 전쟁 준비를 소홀하게 만든 인물’이라는 비판이 따랐다. 그러나 전쟁 이후 김성일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용사일기』는 왜란 중 김성일의 활동상을 정리한 것이다. ‘일기’라고 이름 하였지만 김성일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그를 보좌하던 이로(李魯, 1544~1598)가 기록한 것이다. 서문에서 ‘김학봉용사일록(金鶴峯龍蛇日錄)’, 본문 내용에서 ‘학봉의 사적을 기록한다(記金鶴峯事蹟)’고 하였으니 김성일의 활약상을 이로가 정리한 것이다. 첫머리에 의령현감 서명서가 쓴 서문이 있다. 서문에서, “관군과 의병이 서로 합심하여 두 갈래로 나뉘지 않고 한 마음으로 적을 막아 맹세코 국은에 보답하도록 하였다. 시운이 불리하여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진주성이 함락하게 되었으나 다행히 이 한 권의 책이 있어 충성을 다하고 의(義)를 세운 공을 보는 듯하다.”고 김성일을 칭송하였다. 그 다음에 임금 선조가 경상도 백성에게 내린 교서를 실었다.

 이 글에서 선조는, “임금답지 못하여 능히 백성을 보존하여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다. 적을 방어하는 데에 실패하여 나라를 잃고 파천하여 의주에 물러와 머문 지가 이미 한 달이 지났다. 이것이 무슨 일인가. 죄는 오로지 나에게 있으니 진실로 부끄러움이 깊도다. 서울 회복에 힘을 다하면 살아서는 명예로운 이름을 누릴 것이고 혜택이 자손에까지 이어질 것이다.”고 의병을 독려했다. 이어 「용사일기」라는 소제목으로 본 내용이 이어진다. 「일기」는 김성일의 약력과 인품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말미에, “매사에 공명정대하게만 하고 수단을 쓰지 않아 외롭게 동떨어져 있었음으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범하려는 기미를 알지 못하였다”라고 할 뿐 학봉의 판단 착오를 비난하지 않는다.

 이어서 그의 활동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전쟁 바로 전에 선조는 김성일을 경상우병사로 임명했다. 부임해 가는 도중에 전쟁이 발생하자 선조는 김성일을 잡아들여 책임을 물으려 하였다. 그러나 직산에 이르렀을 때에 석방 명령과 함께 초유사로 임명된다. 이 일은 세자(광해군)의 노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초유사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백성을 보살피고 독려하는 일을 맡는 임시 벼슬이다. 실권이 없는 임시 직책이지만 김성일은 낙동강 서쪽 지방으로 가서 흩어진 관군을 수습하고, 의병을 독려했다. 김성일은 진주의 중요성을 알고 진주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진주목사와 군사들은 도망가 성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슬프고 탄식함을 이기지 못해 강물에 몸을 던지고자 하였지만, “강물이 도도하게 흘러가니 물결이 마를소냐 넋인들 죽을소냐”라고 시를 읊고 헛되이 죽는 것이 이익이 없다고 하여 마음을 굳게 잡았다.

 이후 「일기」에는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 경상우도 의병들의 활약상, 관료들과 백성들의 동태들이 잘 드러나 있다. 「일기」는 왜란 발생 이듬해 4월 그믐에 김성일이 병으로 사망하고, 선영에 안장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렇듯 『용사일기』는 임진년 4월 왜란이 일어난 뒤부터 약 15개월간의 전쟁 상황을 김성일의 활약을 중심으로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용사일기』는 김성일을 보좌한 이로(李魯)의 시각에서 본 임진왜란의 기록이다. 
김철웅(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김철웅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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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m9963@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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