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사랑이 곧 愛國이다
한글 사랑이 곧 愛國이다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09.04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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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사랑이 곧 愛國이다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오는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이 날은 세종대왕(世宗大王)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26년 11월 4일(음력 9월 29일)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가갸날’로 정한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이듬해인 1927년 2월 10일 조선어연구회의 기관지인 『한글』을 창간하면서, 이 날을 ‘한글날’로 고쳐 부르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동안에는 음력 9월 29일을 한글날로 기념해왔는데,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의 서문에 반포일을 ‘9월 상한(上澣)’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상한의 끝날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로 확정하였다.

    朝鮮語辭典 편찬에 착수하다

    한글의 역사는 참으로 길다. 1443년(世宗 25년)에 집현전(集賢殿) 학자들에 의해서 훈민정음 28글자(母音 11字, 子音 17字)가 완성되고 3년 뒤인 1446년에 반포되었으니, 566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한글. 이는 ‘훈민정음’의 현대적 명칭이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이다.

    “국어가 중국과 달라서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일반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자가 많은 지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나니 사람마다 쉽게 학습하여 일용(日用)에 편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는 세종대왕이 친히 쓴 훈민정음의 서문(序文)의 일부이다.

    훈민정음 창제로부터 50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글을 우리가 읽고 쓰고, 다듬어 오늘에 이르렀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언문(諺文) ‧ 언서(諺書) ‧ 반절(反切) ‧ 가갸글 ‧ 국문(國文) 등의 명칭으로 불리어졌는데, 그 가운데서도 ‘언문’이라는 이름이 널리 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한글’로 정착되었다. ‘한글’이라는 말 자체의 뜻은 ‘한(韓) 나라의 글’, ‘큰 글’, ‘세상에서 첫째 가는 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글보급을 주도하기 시작한 것은 주시경(周時經) 선생이 창립한 국어연구학회(國語硏究學會)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그 후 배달말글몯움 → 한글모 → 조선어연구회 → 조선어학회로 그 명칭을 바꾸어가면서 한글보급운동을 전개해왔다. 조선어학회로 명칭을 바꾼 것이 1931년 1월 10일이었다.

    이 때, 조선어학회가 정력을 기울여 추진한 사업이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의 편찬이었다. 이를 통해서 언어와 문자를 비롯한 우리의 고유문화를 유지 ‧ 발전시키고, 민족정신을 앙양하려는 것이었다.

    조선어학회는 사전편찬의 기초작업으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고, 이에 뒤이어 ‘표준말 사정(査定)’을 추진하고 ‘외래어표기법’(外來語表記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순탄하지 못했다. 가장 큰 어려움이 출판비용이었다. 각계의 독지가를 설득하여 사전편찬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고, 1936년 4월 1일부터 편찬이 시작되었다.

    朝鮮語學會 事件을 겪으면서

    우리 속담에 “노루를 피하니 범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 출판비용을 확보하고 편찬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하는데, 7대 조선총독(朝鮮總督) 미나미 지로오(南 次郞)가 민족문화(民族文化) 말살정책을 강행하면서 우리 국어(國語)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동화정책(同化政策)을 내세워 우리 말 교육을 폐지하고 일본어의 사용을 강요하였으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민족지(民族紙)를 폐간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조선어학회의 활동이 순조로울 수가 있었겠는가.

    이로써 세상에서 첫째 가는 우리의 한글은 1942년 10월 일제(日帝)에 의한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다. 일제는 악랄한 무단정치(武斷政治)를 펴면서 애국지사들을 괴롭혔다. 그러던 그들이 ‘학술단체를 가장하여 국체변혁(國體變革)을 꾀한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했다는 죄명으로 조선어학회 관계자들을 함경남도 홍원(洪原)경찰서로 연행해갔다. 말하자면, 학술단체를 가장한 ‘반일(反日) 비밀결사(秘密結社)’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우리 한글을 지켜내려던 수많은 선각자들이 3년간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 때 홍원경찰서에 연행된 이들의 면면은 이러하였다. 이윤재(李允宰) ‧ 이극로(李克魯) ‧ 이희승(李熙昇) ‧ 정태진(丁泰鎭) ‧ 장지영(張志暎) ‧ 최현배(崔鉉培) ‧ 이중화(李重華) ‧ 정인승(鄭寅承) ‧ 김양수(金良洙) ‧ 장헌식(張憲植) ‧ 한 징(韓澄) ‧ 정열모(鄭烈模) ‧ 김법린(金法麟) ‧ 이우식(李祐植) ‧ 안재홍(安在鴻) ‧ 김도연(金度演) ‧ 이 인(李仁) ‧ ‧ ‧ .

    이들은 일제 경찰의 비행기 태우기 ‧ 물먹이기 ‧ 난장질하기 등의 견디기 어려운 고문을 당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행되는 고문은 5개월여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란죄(內亂罪)의 죄명을 뒤집어 쓰고 언제 열릴지도 모르는 재판을 기다리면서 구치감(拘置監)에서 고초(苦楚)를 겪어야 했다. 그들이 더욱 참기 어려운 고통은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세상을 떠나는 동료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1943년 12월 8일에 이윤재를, 이듬해 2월 22일에 한 징을 잃었다.

    목숨을 걸고 우리의 글을 지켜낸 선각자(先覺者)들의 고통은 어떠하였겠는가. 이희승은 그의 자서전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에서 “일제 말기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 동안 갖은 고초를 겪었던 일은 내 개인으로는 물론 우리 문화의 일대 시련이었던 것”이라고 적고 있다.

    한글은 이러한 시련을 이겨낸 우리의 글이기에 더욱 자랑스럽다. 우리 모두 한글 사랑이 곧 애국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한글을 사랑하자. 그리고, 아름답게 가꾸어가자.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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