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자국이라도 조선 땅을 떠나면 조선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한 발자국이라도 조선 땅을 떠나면 조선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 김철웅 연구원
  • 승인 2012.09.11 21:50
  • 호수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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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대학 소장고서 58. 유성룡의 『진사록(辰巳錄)』

 

 ▲ 안동 하회마을에 있는 유성룡의 종택.

 

58. 유성룡의 『진사록(辰巳錄)』


한 발자국이라도 조선 땅을 떠나면 조선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선조 24년(1591년) 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었던 황윤길·김성일 일행이 돌아오면서 가져온 일본 국서는 그 이전의 것과는 달랐다. 그 내용 중에, “병사를 이끌고 단번에 명나라로 쳐들어 갈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러나 선조는 김성일이, “도요토미는 그 인물됨이 보잘것없고 전쟁 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한 말을 믿었다. 그렇지만 김성일과 함께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한 서애 유성룡(1542~1607)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유성룡은 만에 하나라도 있을 전란에 대비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군사 업무에 뛰어난 관료를 일선 지휘관으로 배치하고 화약 무기를 증강하며, 각 요충지에 성곽을 새로 구축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같은 주장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다만 이 과정에서 유성룡은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을 천거하여 전라좌수사로 임명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했다.


  임진왜란은 왜란 발생 초기(1592~1593), 이후 4년에 걸친 휴전 기간, 그리고 정유재란(1597~1598) 등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왜란 기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전쟁이 발발한 시점인 임진년(1592년) 4월부터 이듬해인 계사년(1593년)이었다. 이 2년 동안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시기였고 전투 또한 치열했다. 임진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20s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6월에는 평양을 수중에 넣었다. 일이 위급하게 되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했으며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다. 7월에 처음으로 명군(明軍) 5천 명이 왔으나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패하고 말았다. 이어 이여송이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왔다. 마침내 전쟁 발발 다음해인 1593년 1월에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여 전세 역전의 기회를 마련했다. 이후 권율의 행주대첩으로 사기가 꺾인 일본군은 4월에 서울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퇴각했다. 이렇게 하여 왜란이 일어난 지 1년만에 서울을 수복하고 전세는 안정됐다. 이렇듯 전쟁의 승패가 결정된 두 해의 전쟁 상황을 기록한 것이 『진사록』이다. 임진년의 ‘진’자와 계사년의 ‘사’자 두 글자를 따서 책의 이름으로 삼았다. 


 『진사록』은 왜란 당시 병조판서, 도체찰사, 영의정을 맡아 전쟁을 총괄했던 유성룡이 임진년과 계사년에 국왕 선조에게 올렸던 전쟁 상황과 군사 업무에 관한 서장(書狀)을 엮은 것이다. 그 내용은 2년 동안에 있었던 관군과 명군의 전투 상황, 군량의 보급과 무기의 조달 등 전쟁 수행에 관련된 각종 문제를 보고하고 건의한 것이다. 이 책은 모두 3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1권은 임진년 6월에 일본군이 대동강에 이르렀다는 내용부터 시작하여 같은 해 10월까지 모두 34조의 서장이 실려 있다. 제2권은 임진년 11월, 대동강이 얼어 군량을 평안도 안주로 실어 보냈다는 내용에서 계사년 5월 19일에 명의 제독 이여송 등을 위로할 것을 청하는 내용까지 모두 58조의 서장을 기록하고 있다. 제3권은 계사년 5월, 도성을 지킬 장수로 고언백이 합당하다고 주청하는 내용부터 정유년 12월, 이순신의 활약상 그리고 밤낮으로 철통같이 대비하여 적에게 헛점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까지 모두 19조의 서장이 실려 있다.

  이 책의 내용이 전해주는 바와 같이 유성룡은 7년간의 왜란 동안 행정과 군사를 맡아 관군과 의병을 독려하고 명군을 지원하여 전쟁을 잘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했다. 전쟁 초기에 선조와 일부 신하들이 중국의 요동으로 피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한갓 피란만이 취할 바가 아니라고 하면서 사태의 회복과 국가의 중흥을 앞장 서서 외쳤다.


이때 그는, “왕이 한 발자국이라도 조선 땅에서 떠나면 조선은 곧 우리의 것이 아니다.”고 하여 선조에게 결사 항전의 의지를 요구했다. 전쟁이 끝나고 벼슬에서 물러난 유성룡은 왜란을 반성하고 정리한 『징비록』을 완성했다. 그러나 『진사록』은 급박한 전쟁의 와중에 현장 상황을 보고한 왜란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다.

김철웅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kim9963@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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