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의 음식인문학 19. 강경애의 「소금」과 소금
김주언의 음식인문학 19. 강경애의 「소금」과 소금
  • 김주언(교양기초교육원) 강의전담교수
  • 승인 2012.09.18 11:35
  • 호수 1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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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음식의 주인인가 노예인가

 

 그는 잠깐 귀를 기울여 밖을 주의한 후에 가만히 손을 넣어 소금자루를 쓸어 만졌다. 이것을 팔면 얼만가…… 팔 원하고 팔십 전! 그러면 밀린 집세나 마저 물고……한달 살까? 이것을 밑천으로 무슨 장사라도 해야지. 무슨 장사?……하며 그는 무심히 만져지는 소금덩이를 입에 넣으니 어느덧 입 안에는 군물이 시르르 돌며 밥이라도 한숱 먹었으면 싶게 맛이 버쩍 당긴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침을 두어 번 삼킬 때 소금이란 맛을 나게 한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나 소금이 들지 않으면 맛이 없다. 그렇다! 하였다.    - 강경애,「소금」 중에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 식품으로 기획된 자연물이 속속 새로운 자연으로 우리 앞에 탄생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우리의 입에 들어오기 위해 존재하는 자연은 거의 없다. 본시 어떤 동물도 ‘고기’가 아닌 것이며, 어떤 식물 또한 ‘채소’나 ‘야채’가 아닌 것이다. 그것들은 본성적으로 사람의 먹거리가 되는 것에 완강히 저항한다. 다만 그것들을 순치시킬 줄 아는 사람들에 의해 먹거리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올 뿐이다. 따라서 길들일 수 있는 것과 길들일 수 없는 것이라는 분류는 먹거리로서의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태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길들일 수 있는 것은 생산적인 것이고 길들일 수 없는 것은 비생산적인 것이다. 그래서 전자는 좋은 것이고 후자는 나쁜 것으로까지 여겨진다. ‘나쁜 것’을 솎아내고 처단하는 권력을 통해 인간은 자연을 먹거리로 평정한다.
 
 우리는 이렇게 먹거리를 식민화하고 노예화함으로써 먹거리 자연의 주인이라는 지위를 누린다. 그러나 이 주인의 위치는 처음부터 불완전한 것이다. 먹거리 노예 없이는 먹거리 주인으로서의 우리는 한시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예 없는 주인은 이미 주인이 아니므로 주인은 본시 노예에 예속되어 있는 존재이다. 헤겔 식으로 말하자면 주인은 노예의 노예이고, 노예는 주인의 주인일 수 있음이다.
 
 인간의 주인됨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데 기여하는 인간화된 자연물로는 단연 소금을 꼽을 수 있다. 먹거리 대상을 순치시키고 길들이는 데 소금만큼 강력한 괴력을 발휘하는 것도 달리 찾기 힘들다. 소금을 뿌렸는데도 뻣뻣한 것은 별로 없다. 소금 간이 배이면 숨이 죽고, 억센 것도 드디어 먹을 만한 것이 된다. 그러니 소금만큼 사람에게 이롭고 필수적인 것이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연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이 소금의 주인이라는 사실만큼 해롭고 재앙스러운 것도 없을 것이다.
 
 식민지시대의 여성 작가 강경애의 「소금」(1934)에서도 주인공이 소금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그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인, 이제 그녀는 마지막으로 소금장수가 되어 거칠게 널뛰는 불행의 고삐를 다잡고 자신의 삶을 요리할 수 있는 운명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그녀는 소금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실은 나라를 빼앗긴 처지에서는 아무도 이 여인처럼 자신의 온전한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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