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정충신의 『북천일록(北遷日錄)』
59. 정충신의 『북천일록(北遷日錄)』
  • 김철웅 연구원`
  • 승인 2012.09.18 18:01
  • 호수 1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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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59. 정충신의 『북천일록(北遷日錄)』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이항복의 집이 있었던 인왕산 필운대(겸재 정선의 그림).

  “철령(鐵嶺)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님 계신 구중 궁궐에 뿌려본들 어떠리”라는 시조가 광해군 때에 유행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광해군이 잔치를 열었는데, 누군가 이 시조를 읊었다. 누가 지었는가를 물으니 이항복(1556~1618)이라고 대답하였다. 광해군은 슬픈 기색으로 우울해 하였다고 한다. 이 시조는 유배 가던 이항복이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항복을 유배 보낸 이가 바로 광해군이었다.


 임진왜란 후인 광해군 때에 선조(宣祖)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폐위 문제로 치열한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이항복이 대비 폐위를 극력 반대하자 광해군은 그를 유배 보냈다. 광해군 10년(1618) 1월 8일에 이항복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났는데, 제자인 정충신(鄭忠臣, 1576~1636)이 그를 수행했다. 정충신은 이항복이 북청에 도착해 그곳에서 몇 달을 보내다가 5월 13일에 별세하고, 포천 선산에 묻힐 때까지 함께 했다. 정충신은 이 모든 과정을 일기로 남겼는데, 그것이 『북천일록』이다.

 『북천일록』은 광해군 9년(1617) 11월 1일자로 시작한다. 이날 일기에, “계축년(광해군 5년) 이후로 임금이 인목대비를 유폐하고자 하였다. 허균이 유생으로 하여금 상소를 올리도록 시켰으니 이들은 ‘의로운 일을 하고 난리의 싹을 막겠다’고 하였다. 대제학 이이첨이 주장하고 허균이 돌아다니며 이 일을 성공시켰다.”고 기록하였다. 이어 11월 25일자에 이항복의 상소를 실었다. “신은 8월부터 중풍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어찌 병을 핑계로 묵묵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전하를 위해 이런 계책을 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모가 인자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불효해서는 안됩니다. 효로 화목하게 지내시고 효도하는 마음으로 다스리십시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12월 10일에, “이항복은 감히 협박하는 말로써 전하에게 상소를 올렸고 원망하는 마음으로 공격하였습니다. 역적을 옹호하고 임금을 저버린 죄가 심합니다.”라는 반대파의 공격이 있었다. 계속되는 상소에 광해군은 유배령을 내렸다. 처음 유배지는 평안남도 용강이었으나, 죄가 큰데 편안한 지역으로 유배를 보낸다고 반발하여 결국 함경도 북청으로 결정되었다. 이때가 해를 넘긴 1월 6일이었다. 이날 도성의 백성들이 소매로 눈물을 훔치면서 탄식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한 겨울인 1월 8일, 이항복은 유배길에 올랐다. 다음날 일기에, “날씨가 추워 가는 길이 참담하였다”고 하였고, 11일자에 “함박눈이 하늘을 메워 천지가 어두워 가는 길을 분별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유배길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18일에 함경도로 통하는 철령을 넘었다. 이때의 참담한 심정을 앞서 소개한 시조로 표현했다. 21일에 원산을 거쳐 2월 6일에야 북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강윤박의 집에 들어가 살았다. 병마절도사 현즙이 그를 위해 여러 명의 일꾼을 보냈으나 밥하는 여자 노비 1명과 심부름꾼 1명을 남기고 모두 돌려보냈다. 유배 첫 날의 심정을 그는, “뭇 산들이 호걸을 가두고자 하는데 천 봉우리를 돌아보니 갈 길을 막아 버렸네”라고 하였다. 다음날 고을 원로들이 인사를 왔고 유생 60여 명도 와서 뵈었다.

  유배지에도 봄은 왔다. 3월 28일에 병마절도사가 계곡 가에 머물 곳을 마련해 주었다. 물을 끌어와 못을 만들고 정자를 한 채 지어 휴식 장소로 삼았다. 이항복은 4월 2일에 계곡 정자에 나와 쉬었다. 6일에는 진달래꽃으로 화전도 부쳐 먹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온도 잠시 뿐이었다. 5월 7일에 청나라 군대가 중국(명)을 침범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날 기록에, “이때부터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속을 태웠다.”고 하였다. 11일에 북받치는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억지로 술 한 잔을 마시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입은 열려 있고 손을 떨며 사람 모습 같지가 않았다. 결국 이틀 후에 운명하고 말았다. 시신은 7월 13일에 포천 선산에 도착하였고, 8월 7일 삼우제를 마지막으로 기록은 끝난다. 한편 광해군은 5년 뒤에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김철웅(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김철웅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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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m9963@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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