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볼펜] 백색볼펜 휴무
[백색볼펜] 백색볼펜 휴무
  • 김상천 기자
  • 승인 2012.09.19 15:16
  • 호수 13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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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는 고기가 없어 오늘 하루 쉽니다

◇ 썼다, 지웠다. 거의 다 써놓고 그냥 다 지웠다. 이번 주 백색볼펜 주제를 부모와 학부모의 차이로 정해놓고 일주일 간 생각을 정리하고 자료를 모았는데, 폐기처분했다. 이렇게 뻔한 말을 이렇게 뻔한 형식으로 해서 무엇 한단 말인가, 하는 회의가 글을 다 지워버렸다. 정형화된 것들은 재미없다 정말. 넥타이를 졸라맨 듯 답답해보였다. 헬리콥터 맘과 캥거루 대디에 대한 아쉬움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휴지통에서 지워졌다. 나는 양치질을 하러 갔다.

◇ ‘마음에 드는 고기가 없어 오늘 하루 장사 쉽니다.’ 맛 좋기로 소문난 식당이 문을 걸어잠궈놓고 붙여놓은 쪽지가 저번 달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었다. 맛 좋기로 소문날 글도 못 쓰는 주제에, 뻔뻔하게 나는 오늘 하루 장사를 쉬려 한다. 그것도 대놓고. 아마 전국 뻔뻔한 대학신문 편집장 경연대회 같은 게 있으면 나는 최소한 4강 시드는 받아야 한다.

◇ 누가 중앙일보 대학생칼럼이라는 곳에 글을 한번 보내보라길래 어떤 글들을 쓰는지 들여다봤다. 과연, 글 잘 쓰는 학생들이 많았다. 근데 많이 읽진 못하겠더라. 너무 다 똑같이 써서 재미가 없었다. 페이지를 운영하는 논설위원은 참 지루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장난기가 발동했다. 저번호 백색볼펜, 갸루상은 이렇게 말했다를 보냈다. 이런 날라리 같은 글도 읽어주는지 모르겠다, 웃기려고 노력한 글이니 싣지 못하면 피식 한번 웃어나 주시라고. 내심 첫 문단만 보고 버릴 거라 생각했다. 오호라 근데 의외로 답장이 왔다. 그것도 재밌다고. 칼럼 선정엔 다른 학생들의 반응도 감안되니까 글을 올려달란다. 여기서 나는 좀 쿨한 척했다. 페이스북에 올리고 싶진 않다. 읽혔으니까 만족한다. 신문엔 잘 쓰는 다른 학생들 글이 실려야할 것이다. 답장을 보내고 나서 스스로 쫌 멋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또 답장이 왔다. 혼자 보긴 아쉽다고. 나는 못 이긴 척 갸루상을 올렸다.

◇ 그래서 글이 실렸느냐고? 에이, 만약 실렸다면 이렇게 대놓고 자랑을 하겠나. 그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다. 갸루상보다 정돈되고 잘 쓰인 글이 그 주의 칼럼으로 뽑혔다. 실은 꾸준히 쿨한 척 했지만 좋아요가 많아지면서 나도 내심 스펙업! 취직업!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설레긴 했다. 그래도 기분 좋았다. 평소 재밌게 읽던 강홍준 논설위원께 갸루상의 맨 앞 도입과 맨 끝 퇴장 부분만 좀 진중하게 갔으면 이번주 칼럼으로 선정하려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골 때리는 글을 진지하게 읽어줬다는 게 참 고맙더라. 왠지 죄송하기도 하고. 이 자리를 빌어 백색볼펜을 꾸준히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께도 저의 오두방정에 대한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그러나, However,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또 다짐했다. 난 그냥 계속 좀 이상하게 살자. 왜냐? 재밌으니까. 또 사람들은 유치한 걸 좋아하지 않나. 나도 언젠가 강남스타일처럼 뜰 수 있지 않을까? 음 그건 아닌 거 같다. 

<칙>

김상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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