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은 넓으나 성품을 기르는 공부는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학문은 넓으나 성품을 기르는 공부는 부족한 것이 아닌가
  • 김철웅 연구원
  • 승인 2012.09.25 20:36
  • 호수 13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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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대학 소장고서 60. 이전인, 『관서문답록(關西問答錄)』

60. 이전인, 『관서문답록(關西問答錄)』

학문은 넓으나 성품을 기르는 공부는 부족한 것이 아닌가

 

▲권력 남용을 일삼던 김안로를 반대하다가 파직 당한 후 은거했던 독락당(보물 413호).

광해군과 대북파가 선조(宣祖)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폐위하려 하자 이항복은 이를 극력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북파의 탄핵을 빌미로 광해군은 그를 유배 보냈다. 처음에 광해군은 이항복에게 벼슬을 삭탈하고 고향으로 쫓아버리는 ‘방귀전리(放歸田里)’를 명했다.  이후에 다시 일정한 곳을 지정하여 머물게 하는 ‘중도부처’로 바꾸었다. 그러나 죄에 비해 처벌이 가볍다는 반발이 계속되자 먼 곳으로 귀양 보내도록 하였고, 유배지는 평안도 용강으로 정해졌다. 그렇지만 이곳이 서울과 가깝고 편안한 지역이라 하여 함경도 북청으로 결정되었다. 이항복의 유배 과정에서 조선시대 유배형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유배형은 조선의 고위 관료에게는 일상과 같은 빈번한 형벌이었다. 성리학의 이(理) 학설을 정립하여 퇴계 이황의 학문에 큰 영향을 주었던 이언적(1491~1553)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종이 즉위 8개월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복 동생인 명종이 12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당시 정계는 인종을 지지하는 대윤과, 명종을 옹립한 소윤으로 갈려 대립하였다. 명종의 즉위로 세력을 얻은 윤원형(소윤)은 을사사화로 대윤을 제거하고,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비난한 ‘양재역 벽서사건’을 빌미로 나머지 정적들도 숙청하였다. 이때 이언적도 이 일에 연루되어 있다고 하여 평안북도 강계로 유배되었다.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유배 간 이언적의 옆에는 그의 아들 이전인(1516~1568)이 있었다. 이전인은 천성이 온화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배움과 실천에 정성을 다하였다. 일찍이 그는 지성으로 도를 행함에, “군부(君父)나 귀신이 위에 있는 것 같이 하고 얇은 살얼음이 아래에 있는 것 같이” 할 것을 맹세할 정도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이언적이 63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6년 동안 시중들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전인은 그 내용을 기록하여 『관서문답록』이라 하였다.


이 책은 49조의 본문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의 내용은 구인(求仁)의 방법, 상례와 제례 등 학문에 대한 문답, 그리고 조식·김안국 등의 처신에 대한 논평이 있다. 부록에는 이전인의 상소와 책의 발문을 실었다. 내용을 보면, “아버지께서 귀양 간 이듬해 유월 열 여드렛날에 할머니께서 별세하셨다. 아버지께서 그 소식을 들으시고 귀양갈 때 지니고 떠나셨던 할머니의 옷을 모셔놓고 신위를 차리신 다음, 제사를 드리셨다. 그 정성과 공경이 더할 수 없이 지극하시어 삼년상이 넘도록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셨다. 그리하여 몸을 여위심이 날로 심하였다.”고 이언적의 유배 생활을 기록했다. 그리고 “하루는 아버지께 『논어』를 배우면서 음양의 이치에 대해 여쭈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물은 음이지만 그 뿌리는 양이므로 속은 밝고 겉은 어두운 것이요, 불은 양이지만 그 뿌리는 음이므로 바깥은 밝으나 안쪽은 어두운 것이니라. 남자는 양이 등에 있고 음이 배에 있어서 물에 빠져 죽은 남자는 배가 밑으로 가고 등이 위로 가는 것이요, 여자는 음이 등에 있고 양이 배에 있어서 물에 빠져 죽은 여자는 등이 아래로 가고 배가 위로 하여 뜨는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 이치를 깨달았다.”고 하였다.

 이전인이, “경(敬)과 성(誠)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라고 묻자 대답하시길, “‘성’이란 것은 순수하고도 한결같아서 결코 쉬지 않는 것이니 어찌 ‘성’하면서 ‘경’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지경(持敬)의 공부가 익숙하게 되어 세월이 흐르면 ‘성’이 되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전에 김안국과 함께 종묘에 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처음에 들어설 때에는 지극히 공순하고 엄숙하였으나 얼마 지나자 좌우를 돌아보며 옆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경’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그는 학문은 넓으나 마음을 지키고 성품을 기르는 공부는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평상시 좋을 때는 사람 알기가 심히 어렵다. 곤궁한 때를 지나봐야 그 충신함을 알 것이니라.”고 하였다. 이렇듯 『관서문답록』은 아버지와 아들이자, 동시에 스승과 제자였던 두 인물이 학문과 삶에 대해 나눈 대화록이다.
김철웅(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김철웅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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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m9963@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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