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誌가 救國에 앞장 서다
雜誌가 救國에 앞장 서다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10.04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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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誌가 救國에 앞장 서다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오는 11월 1일은 ‘잡지(雜誌)의 날’이다. 이는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소년」(少年)을 창간한 1908년 11월 1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1965년 사단법인 한국잡지발행인협회(현재 한국잡지협회)가 제정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소년」 창간보다 앞서 1883년에「한성순보」(漢城旬報)가 창간되었지만, 이는 신문과 잡지를 겸한 체제였다. 따라서, 이를 최초의 잡지라고 하기가 어려우므로, 1908년 11월 1일에 창간된 「소년」을 우리나라의 최초의 근대적인 잡지로 보게 된 것이다.

         崔南善, 新文館을 세우다

       「소년」은 육당이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하고, 소년을 교도하기 위하여 창간한 본격적인 월간잡지이다. 그리고, 창간호에 실린 육당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는 우리나라 신체시(新體詩)의 효시로서,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소년」의 길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1909년 3월 1일에 발간된 제2권 제3호에 실린 “이런 말삼을 들어보게”가 국권회복(國權回復)에 관한 기사로 지목되어 압수 당하면서 일제(日帝)로부터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압수되면서 발행금지를 당했는데, 1911년 5월 15일에 발행된 제4권 제2호에 실린 박은식(朴殷植)의 “왕양명선생실기”(王陽明先生實記)로 인하여 발행을 정지 당하면서 통권 제23호로 폐간되고 말았다.

       이러한 수난을 겪은 「소년」은 단순한 교양지로서의 잡지에 머문 것이 아니라 여기에 서양문물을 소개하여 소년들로 하여금 선진한 외국문화를 접하게 함으로써 구국의식(救國意識)을 심어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소년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성인들에게도 망국(亡國)의 아픔을 헤아리게 하는 구실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국권(國權)을 회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문화운동에 헌신하던 최남선은 일제의 탄압으로 「소년」이 폐간되자, 이에 굴하지 않고 「붉은저고리」(1912년 1월) ‧ 「아이들보이」(1913년 9월) ‧ 「새별」(1913년 9월) ‧ 「청춘」(1914년 9월) 등의 잡지를 연이어 발간하면서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펴나갔다.

       최남선이 진학문(秦學文)과 공동으로 「동명」(東明)을 창간한 것도 큰 의미를 가진다. 1922년 9월 3일의 일이었다. 「동명」은 타블로이드판 22페이지의 주간잡지였는데, 이는 민중들에게 근대적 사상을 확립시켜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래서, 「동명」이 창간되자 2만부라는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제3호부터는 “조선역사 통속제화”(朝鮮歷史 通俗諸話)를 게재함으로써 학생들로부터 큰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날이 갈수록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압력이 심해져서, 1923년 6월 3일 제41호를 끝으로 폐간하고 말았다.

        國權回復을 위한 救國精神을 담아내다

        한말(韓末)에 국운(國運)이 기울어가자 많은 구국단체(救國團體)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1896년 서재필(徐載弼)이 중심이 되어 설립된 독립협회(獨立協會)이다. 독립협회는 1896년 11월에 기관지 「대조선독립협회 회보」(大朝鮮獨立協會 會報)를 창간한다. 독립협회는 이 회보를 통하여 민중들에게 근대적인 새로운 지식을 전달하고, 애국애민정신(愛國愛民精神)과 민주주의사상(民主主義思想)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 당시에는 구국(救國)의 기치를 내걸고 설립된 단체들이 그 단체의 홍보를 목적으로 기관지의 형태로 잡지를 발간하였는데, 이 잡지 또한 구국정신(救國精神)을 담고 있었다.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의 「동광」(東光),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대한자강회 월보」(大韓自强會 月報), 대한협회(大韓協會)의 「대한협회 회보」(大韓協會 會報), 천주교의 「경향잡지」(京鄕雜誌), 감리교회 계통의 「그리스도인 회보」, 서북학회(西北學會)의 「서북학회 월보」(西北學會 月報) 등이 그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활동하는 애국단체도 기관지를 발행하였는데, 동경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의 「학지광」(學之光), 하와이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의 「합성공보」(合成公報), 샌프란시스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의 「대동공보」(大同公報) 등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들 잡지 중 「학지광」은 그 의미가 참으로 컸다. 이는 1914년 4월 2일에 창간된 동경 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로서, 학우회의 소식을 비롯하여 논문 ‧ 수필 ‧ 시 ‧ 소설 등을 게재함으로써 학문연구의 장(場)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해왔다. 뿐만 아니라, 「학지광」은 젊은 학생들에 의하여 우리 글로 펴냄으로써 국내의 동포들에게도 개화에 눈을 뜨게 한 어둠 속의 한 가닥 빛이었다.

        동경 유학생들은 때로는「학지광」의 지면을 통해서 나라 잃은 울분을 토로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이를 매개로 하여 조국광복의 꿈을 키워나갔다. 1919년 2월 8일, 미국 윌슨(Wilson, T. W.) 대통령의 「평화안 14개조」(The Fourteen Points)에 고무된 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하고, ‘2 ‧ 8 독립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학지광」은 일제(日帝)의 강압에 의하여 압수, 정간을 수없이 거듭하면서 1930년 4월 5일 통권 제29호로 종간될 때까지 신문화의 보급과 유학생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그 역할을 이어왔다.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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