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權回復에 一生을 바치다
國權回復에 一生을 바치다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10.08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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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權回復에 一生을 바치다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오는 11월 12일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이 태어난 날이다. 그는 1878년 11월 12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초리면(草里面)에서 태어나 1938년 3월 10일 옥고(獄苦)로 인하여 병환을 얻어 애석하게도 향년 60세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순국(殉國)하였다.

    至誠一貫, 祖國의 獨立만을 위하여

    그는 오로지 60년 전(全) 생애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바쳤다.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에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 도산은 일생동안 이 말을 입에 외고 살았다.

    그리고, 도산은 이 말을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았다. 독립은 도산의 종교요 신앙이었다. “대한민족(大韓民族)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될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안창호가 죽어서 한국이 독립된다면 기꺼이 죽으리라”는 말을 되내이기도 하였다.

    1937년 7월, 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일본 검사의 조사를 받으면서,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한 것이며, 잠을 자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도산의 독립의지(獨立意志)가 배여 있는 말이다.

    1894년, 도산은 외세(外勢)의 물결이 한반도(韓半島)에 밀려오는 격동기에 좁은 시골 구석에 머물러 있을 수만 없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마음을 굳게 다진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서 미국 선교사(宣敎師) 언더우드(Underwood, H. G.)가 세운 구세학당(救世學堂)에서 신학문을 공부하면서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이것이 조국의 독립에 헌신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도산은 스스로 험난한 가시밭길을 찾아나섰던 것이었다. 1897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 이 때부터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히게 된다. 그리고, 도산은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나라를 찾아서 번영된 조국을 건설할 것인가’에 몰두하게 된다. 이러한 도산의 조국(祖國) 사랑의 정신은 그의 일생을 통해서 불변한다.

    1899년, 도산은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강서군 동진면(東津面)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힘을 쏟는다. 이 학교는 ‘점진적인 공부와 수양을 계속하여 민족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소학교(小學校) 과정인데, 이 학교는 도산의 점진사상(漸進思想)을 실천하는 무대였다.

    또, 도산은 1907년 평양(平壤)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성의 계도에 심혈을 기울리게 된다. 이 학교는 중등교육기관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소정의 학과수업 이외에 민족정신의 고취와 민족성의 개조를 교육방침으로 삼고 민족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치중하였다. 도산의 교육방침은 건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愛國心) 있는 국민의 양성이었으니, 이는 도산의 민족운동(民族運動)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도산의 삶은 민족운동 그 자체였다. 1906년 미국에서 귀국한 도산이 이 갑(李甲) ‧ 이회영(李會榮) ‧ 이승훈(李昇薰) ‧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한 것을 비롯해서 국내외를 오가며 수많은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모두 하나같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그의 삶 자체였다.

    도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臨時政府) 조직과 체제 정비에도 온 힘을 쏟았다. 3 ‧ 1 운동 직후, 중국 상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여 내무총장 ‧ 노동국 총판 등을 역임하면서, ‘국민은 정부를 중심으로 통일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지론을 실천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철학(政治哲學)은 당시 임시정부를 둘러싼 여러 계층과 부류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독립운동의 방략을 세우는 데도 크게 작용하였다.

    興士團을 조직하다

    도산은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밖으로 눈을 돌리면서 190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첫 둥지를 틀었다. 그에게 새로운 가시밭길이 시작된 것이었다.

    도산이 가장 먼저 눈을 돌리게 된 것이 ‘미국에 있는 동포들의 생활을 지도하는 것’이었다. 동포들의 올바른 생활태도가 중요하다고 본 것이었다. 1903년, 한인(韓人) 친목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만들고, 동포들의 생활개선과 인격수양에 착수했다. 그리고, 기관지인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한 것은 1905년의 일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샌프란시스코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주 전체로, 나아가 하와이 ‧ 멕시코에 거주하는 동포들에게까지 확대되어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발전해갔다. 국민회는 조국독립운동의 중요기관으로 성장하였는데, 1910년대 미주(美洲) 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대표기관으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 때, 도산이 대한인국민회의 중앙총회장을 맡고 있었다.

    도산은 이 무렵 자주적으로 민족의 운명을 열어가려면 ‘힘을 키워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곧 힘이 ‘독립의 기초’라는 것을 절감한다. 그는 나라를 잃게 된 것은 그 원인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그가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것이 민족부흥운동단체(民族復興運動團體)인 흥사단(興士團)이다. 이에는 8도(道) 대표로 미국에 유학 중인 청년학생들이 참여하였는데, 조병옥(趙炳玉) ‧ 안종익(安鍾翊) ‧ 강영소(姜永韶) ‧ 김종림(金宗林) 등이었다.

    흥사단은 민족부흥을 위한 민족의 힘을 기르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이를 위해서 덕(德) ‧ 체(體) ‧ 지(知)의 3육(三育)을 수련하였다. 이를 위해, ‘힘의 3대 원칙’으로 자력주의(自力主義) ‧ 양력주의(養力主義) ‧ 대력주의(大力主義)를 표방하였다. 그리고, ‘4대 정신’으로 무실(務實) ‧ 역행(力行) ‧ 충의(忠義) ‧ 용감(勇敢)을 앞세우고, 국민계몽에 힘썼다.

    흥사단! 이것은 도산의 필생의 사업이요, 그의 민족운동의 근본이었다. 9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그 고귀한 사상과 민족혼(民族魂)은 우리 후세들에게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흥사단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나는 죽음의 공포가 없다. 나는 죽으려니와 내 사랑하는 동포들이 그렇게 많은 괴로움을 당하니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임종(臨終)을 앞두고 한 도산의 비장한 이 한 마디가 나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어찌 나만이겠는가.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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