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의 음식인문학 20. 구효서의 「소금가마니」와 두부
김주언의 음식인문학 20. 구효서의 「소금가마니」와 두부
  • 김주언(교양기초교육원) 강의전담교수
  • 승인 2012.10.09 12:47
  • 호수 13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두부, 힐링푸드가 보여주는 사랑의 방정식

 

 헛간은 늘 어두웠다. 장독대 밑을 흐르는 수맥이 헛간을 관통하고 있어서 습기로 가득했다. 장마철이 아니어도 소금가마니는 잘 녹아내렸다. 눈물처럼 간수를 흘렸다.
 
 쌀가마니와는 달리 소금가마니는 묵은 짚으로 성글게 짠 것이었다. 간수는 어둠과 습기를 한껏 빨아들여야만 얻을 수 있는 거였다. 간수는 누구나 좋아하는 맛있는 두부를 만들어냈다. 특히 어머니가 만든 두부는 근동에 유명했다. 가족을 먹여살린 것은 어머니의 두부였다.(…) 평생, 자기를 증오하듯 어둠과 습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식을 사랑으로 지켜온 어머니의 시신이 간수를 빼낸 새하얀 소금처럼 정화되어 꽃상여 안에 누워 있었다. 무명 상복을 입은 서른 명의 자식과 손주 들이 숨두부처럼 몽글몽글 상여 뒤를 따랐다. 그 무성하고 엄숙하게 연속되는 생명들을 바라보며 나는 마침내 혼자 울며 중얼거렸다. 당신의 생은 위대했습니다.
                                              ―구효서,「소금가마니」 중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유품으로 책이 한 권 발견된다. 일어판 키에르케고르의『공포와 전율』이었다. 정규 학교 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무학인 처지의 어머니가 철학 서적을, 그것도 일어로 읽었다니, 어머니를 다시 발견하는 아들은 놀라울 따름이다. 평소 어머니는 그칠 줄 모르는 아버지의 모진 학대와 폭력에 시달린 분이었다. 두부를 잘 만들었던 어머니는 느닷없이 엉덩이를 걷어차여 두부가 끓고 있던 가마솥으로 수차례 곤두박질쳤고, 밤새워 만든 두부모판에 얼굴이 처박히기도 일쑤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푸념을 늘어놓지도 않았고 아버지의 폭력에 대항하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폭압을 이겨낼 수는 없어도 그것에 짓이겨지지는 않았고 대신 폭압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두부로 가족을 먹여살린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전란 중에는 국군을 위해서도 두부를 만들었고, 인민군을 위해서도 두부를 만들었다. 따라서 두부는 일종의 힐링 푸드인 셈인데, 힐링 푸드를 제조하는 어머니는 대추나무에 떨어져 죽어가는 딸을 들처업고 비내리는 어둠속을 내달려 딸을 살려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여기에 이르면 이 슈퍼우먼의 이름은 단지 어머니가 아니라 대지모신(大地母神)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대지모신으로서의 어머니가 가진 가장 신비한 힘은 불멸을 낳는다는 데 있다. 영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필멸의 육체에게도 간수에서 태어난 저 순두부처럼 “무성하고 엄숙하게 연속되는 생명들”의 사랑의 역사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과 헌신으로 이 모든 생명들을 피워올린 어머니의 삶이 두부의 제조 비법을 말한다. 두부는 어두운 곳에 놓인 소금가마니에서 눈물처럼 흘러나온 간수로 만드는 법인데, 이 간수는 어둠과 습기를 한껏 빨아들여야만 나오는 것이다. 이 두부 탄생의 비밀을 우리는 무슨 레시피 정도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마땅히 사랑의 방정식으로 읽어야 한다. 어머니의 생애는 어둠과 습기를 기꺼이 자신의 몸으로 끌어안으며, 어둠속 한 방울 간수 같은 눈물로 자신의 존재가 통째로 쥐어짜질 때 비로소 완성됐던 것이다. 새하얀 순두부 같은 눈부신 사랑이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