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강 맑고도 깨끗해 정치도 저 물과 같아
대동강 맑고도 깨끗해 정치도 저 물과 같아
  • 김철웅(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 승인 2012.10.09 17:07
  • 호수 13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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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신광수의 『관서악부(關西樂府)』


61. 신광수의 『관서악부(關西樂府)』

대동강 맑고도 깨끗해 정치도 저 물과 같아

 

▲단원 김홍도가 그린 「평안감사향연도」.


『청구야담』에는 평안감사의 기이한 꿈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 중신(重臣)이 어릴 적부터 생일날만 되면 꿈을 꾸었다. 꿈에 어떤 집의 노부부가 많은 반찬을 정갈하게 차려 주었고 자신은 그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었다. 그러나 노인 내외는 그 앞에서 밤새껏 통곡하였다. 매년 같은 꾸니 항상 의아하게 여겼다. 후에 평안감사가 되어 가는 길에 어떤 집이 있었는데 꿈에서 보았던 것과 흡사하였다. 집에 들어가 주인 부부의 얼굴을 보니 꿈속에서 보았던 사람들이었다. 자식이 있는지를 물으니,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하루는 ‘대장부라면 마땅히 평안감사는 되어야지!’라고 하였는데 그날부터 병으로 누워 신음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아이의 죽은 날짜는 감사의 생일과 똑 같았다. 감사가 노부부에게 꿈에 관해 말해 주고 좋은 집과 땅을 사 주었더니 그 이후로는 이전과 같은 꿈을 꾸지 않았다. 속담에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좋은 거라도 당사자가 내키지 않으면 억지로 시킬 수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속담이 생길 정도로 평안감사는 출세의 상징이었고, 소설과 옛 이야기의 주 무대였다. 평안감사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건 감영이 있는 평양의 정치 경제적 위상 뿐만 아니라 그 경치가 큰 몫을 했다.    


신광수(1712~1775)는 영조 50년(1774)에 평안감사로 있던 채제공을 위해 시를 짓고 이를 『관서악부』라 하였다. 남인이었던 채제공이 평안감사에 오르자 부임을 축하하며 지인들이 시를 지어 환송하였다. 그러나 신광수는 영릉참봉으로 지방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미처 시를 지어 보낼 수가 없었다. 나중에 채제공의 독촉을 받고서야 시를 지어 보냈다.


『관서악부』는 관서 지방(지금의 평안도)의 역사·풍속·지리 등을 소재로 한 108수의 연작시이다. 시는 5월부터 시작하여 가을, 겨울, 봄까지 108수의 시에 평양과 묘향산, 그리고 청천강 일대의 경치, 산천, 고적 등을 담았다. 먼저 감영이 있는 평양을 ‘천하제일강산’이라 하며, “평양은 화려하니/태평한 세월로 4백 년을 잇고/천하제일 강산에 부귀”하고, “구름 사이 단정히 솟은 모란봉은/새로 치장한 옥녀의 얼굴”이라 하였다.

채제공이 부임한 시기는 여름철이 시작하는 5월이었다. “장림의 5월 녹음이 짙어가는데/십 리 쌍가마에 요란한 권마성 소리/영제교 앞에는 3백의 기생이/길 양편에 늘어서 행차를 맞이” 하였다. 대동강 나루터의 숲인 장림, 잡인을 물리치고 행차 길을 열어주는 하졸들의 외침(권마성), 그러한 감영 행차를 맞이하는 평양 기생의 모습 등을 묘사하고 있다. 이어 “선화당에 처음으로 오르니/육방 군리들이 차례로 늘어선다”, 그리고 며칠 뒤에 “새벽 무렵 문묘에 참배하고 돌아와/단군사당 아래서 잠시 배회” 하였다. 평안감사는 부임하면 먼저 문묘에 제사하고 단군묘를 참배하였던 것이다. “안주(安州)의 병사는 활집에 전동 차려 입고/군악 울리며 행차 맞는데”, “높고 높은 철옹성이 있어/약산에서 남쪽 보니 이곳이 병영일세”라고 하며 안주, 영변 순시의 모습을 그렸다. 약산은 김소월의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으로 유명하다. 영변에는 묘향산이 있다. “묘향산엔 탑이 층층이고/청허한 법은 구세를 밝히는 등불이라” 하였고, 압록강변에서는, “한적한 압록강 주변 마을에/쑥대머리 심마니들 말 앞에서 우네”라고 하였다. 산삼은 진상품으로 백성들의 고초가 컸다. 이에 ‘쑥대머리 심마니’들이 자신들의 고단함을 호소하고 있다. 신광수는 대동강 물을 보고 “맑고도 깨끗해/정치도 저 물같아 가문의 명예로다/지금 도내엔 청렴하여 일이 없으니/돈과 비단이 감영에 얼씬 못하네”하며 감사의 선정과 청렴을 칭송했다. 그리고 마지막 수에서, “푸른 실로 꿰맨 봉급 삼십만 전/강가의 정자도 밭도 사지 않았네/돌아오는 날엔 보국한다는 일념으로/흰 나귀 타고 동쪽 나루를 건너리라”고 하여 봉급도 백성을 위해 다 쓰고 오직 나귀 한 마리만 타고 복귀하는 모습을 그렸다. 신광수는 벗 채제공이 청백리로서 임무를 마치고 청렴하게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김철웅(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kim9963@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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