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국인의 책갈피 ④ 이시영 교수가 제자들에게
단국인의 책갈피 ④ 이시영 교수가 제자들에게
  • 이시영(시인·문예창작과) 초빙교수
  • 승인 2012.10.16 12:12
  • 호수 13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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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시집 「와온 바다」(창비 2012)

 

 「사평역에서」의 시인 곽재구 시인이 십여 년 만에 펴낸 아름다운 서정시집이다. ‘와온’은 순천만에 있는 갯마을 이름이고 저자는 이곳에서 가까운 순천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고 있어 그가 평소에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한다. 시집에서 내가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시 한편을 소개한다. 「백야도에서」. 
 
 작약이 피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 뜨거운 일

 

 실비 속으로
 연안 여객선이 뱃고동과 함께 들어오고

 붉은 꽃망울 속에서
 주막집 아낙이
 방금 빚은 따뜻한 손두부를 내오네

 낭도 섬에서 빚었다는 막걸리 맛은 융숭해라
 파김치에 두부를 말아 한입 넘기는 동안

 붉은 꽃망울 안에서
 아낙의 남정네가
 대꼬챙이에
 생선의 배를 나란히 꿰는 걸 보네
 운명의 과녁을 뚫고 지나가는 불화살

 늙고 못생긴 후박나무 도마 위에 놓인
 검은 무쇠칼이 무심하게 수평선을 바라보는 동안
 턱수염 희끗희끗한 사내가
 추녀 아래 생선꿰미를 내걸고 있네

 작약이 피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 뜨거운 일

 물새 깃털 날리는 작은 여객선 터미널에서
 계요등꽃 핀 섬과 섬으로 연안여객선의 노래는 흐르고

 대꼬챙이에 일렬로 꿰인 바다
 핏기 말라붙은 어족의 눈망울 속
 초승달이 하얗게 걸어들어가는 것을 보네

 흔히 시를 ‘언어로 그린 그림’이라고 말한다. 전문 용어로는 이미지즘 시. 이 시는 ‘백야도’라는 어촌에서의 경험을 시적 언어로 관통하여 마치 잘 말린 생선처럼 신선하게 우리 눈앞에 현시해줌으로써 시가 경험의 산물이면서도 그 경험 중에서도 ‘시적 순간’을 포착하여 적확하며 생동하는 언어로 보여주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이 시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제1연 “작약이 피는 것을 보는 것은/가슴 뜨거운 일”이다. 시인이란 누구인가? 작약의 개화 앞에서 가슴이 뜨거울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좋은 시에는 반드시 한 구절의 비상한 관찰이 숨어 있어 평범한 풍경을 비범한 무엇으로 만드는 지혜 내지 통찰이 스며 있기 마련인데, 나는 이 시에서 그 예를 “운명의 과녁을 뚫고 지나가는 불화살”로 본다. “아낙의 남정네” 즉 “손두부를 내오”는 “주막집 아낙”의 남편이 “대꼬챙이에/생선의 배를 나란히 꿰는” 것을 시인은 “운명의 과녁을 뚫고 지나가는 불화살”로 승화시켜 독자들을 돌연히 시적인 순간으로 비약케 한다. 그리고 뛰어난 시작품에는 반드시 이 시적 비약의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그래서 산문을 초월한 ‘시’라고 부른다.
 가을은 무성했던 여름의 진초록들이 단풍으로 붉게 익어가는 계절이다. 시인이 그러했듯이 우리 또한 붉게 타오르는 단풍 앞에서 가슴 뜨거운 젊은 날들을 보내자. 그리고 “낭도 섬에서 빚었다는” 융숭한 막걸리 맛에라도 취해보자. “파김치에 두부를 말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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