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12隻의 배가 남았사옵니다
아직도 12隻의 배가 남았사옵니다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10.16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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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12隻의 배가 남았사옵니다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오는 11월 19일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적탄(敵彈)에 맞아 순직(殉職)한 날이다. 1598년, 그 때 장군의 나이 54세였다.

    閑山島 海戰을 勝利로 장식하다

 

    1592년(朝鮮 宣祖 25년) 4월 13일,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닻을 높이 단 병선(兵船) 수십 척을 이끌고 부산포(釜山浦)에 이르렀다. ‘7년전쟁(戰爭)’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것이다. 부산 첨사(僉使) 정 발(鄭撥)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지만, 신무기(新武器) 조총(鳥銃)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왜군(倭軍)은 부산을 거쳐 동래(東萊)를 함략시키고, 동 ‧ 중 ‧ 서의 세 길로 나누어 김해(金海) ‧ 양산(梁山) ‧ 밀양(密陽) ‧ 대구(大邱)를 지나 거침없이 북상(北上)했다.

 

    이 때,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은 5월 4일 옥포(玉浦)에 출전하여 왜선(倭船) 30여척을 격파하는 전과(戰果)를 올렸다. 장군은 반도(半島)의 남단 여수(麗水)에 자리잡은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서 왜군(倭軍)의 침략을 예견하고 예하 각진(各陣)의 실태를 점검, 군비(軍備)를 강화했던 것이 승전(勝戰)의 결과를 가져왔다.

    5월 7일, 옥포해전(玉浦海戰)을 승리로 장식한 장군은 군비를 강화하는 한편 군기(軍紀)를 바로 잡는 데 힘썼다. 그리고, 장병들에 대한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엄격하게 함으로써 사기(士氣)를 진작시켰다. 이를 위해 시사대회(試射大會)를 개최하고,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에서는 임진왜란에서 처음으로 거북선이 등장한다. 이로써 우리 수군(水軍)의 사기는 더욱 충천했다.

    이순신 장군은 철두철미한 전략가(戰略家)였다. 신무기(新武器)를 만들어 적을 무찌르기도 하고, 조수(潮水)의 밀물 ‧ 썰물을 이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진 해전은 한산도(閑山島)에서였다. 장군은 일본 수군장(水軍將) 와키사카 야스하루(勝坂安治)의 함선(艦船) 70여척이 견내량(見乃梁, 지금의 統營)에 정박하고 있다는 적정(敵情)을 확인하고, 전의(戰意)를 가다듬었다.

    “나라가 존망(存亡)의 위기에 처해 있으니, 이 한 몸 죽음으로 임금의 은혜를 갚으리라.” 장군의 충성심을 보는 듯 하다.

 

    1596년 7월 7일, 격전(激戰)의 아침이 밝았다. 장군의 지휘에 따라 출동을 알리는 북소리가 높이 울려퍼졌다. 사기가 오른 우리의 전함(戰艦)은 일제히 돛을 올렸다. 한산도 앞바다에 다달은 우리 전함은 전진과 후퇴를 되풀이하면서 적함(敵艦)을 유인, 지자총통(地字銃筒) ‧ 현자총통(玄字銃筒) ‧ 승자총통(勝字銃筒)을 쏘아대면서 적함을 격파했다. 66척의 적함이 힘없이 바닷물에 잠겼다.

    한산도대첩(大捷)! 한산도해전은 행주산성(幸州山城)싸움 ‧ 진주성(晋州城)싸움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三大捷)으로 불린다. 이 해전에서 우리 수군이 패하면 제해권(制海權)을 상실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각오는 참으로 비장할 수 밖에 없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한산도가(閑山島歌)는 적진(敵陣)을 바라보면서 작전을 구상하는 장군의 심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權 慄 都元帥 막하에 白衣從軍하다

 

    1597년 1월,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던 이순신 장군에게 청천의 벽력이 떨어졌다. 원 균(元均)의 모함으로 서울로 압송된다. 바다의 큰 별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고 옥(獄)살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 탁(鄭琢)의 변호로 사형을 면하고 풀려나와 권 율(權慄) 도원수의 막하에 백의종군(白衣從軍)한다.

 

    그러던 중, 그 해 7월 원 균이 다대포(多大浦) ‧ 칠천곡(漆川谷)에서 참패하자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에게 다시 3도수군통제사의 어명(御命)이 내려졌다. 이 때, 133척의 적함이 명량(鳴梁, 울돌목)에 몰려오게 되어, 이순신은 회령포(會寧浦)에 이르러 12척의 함선으로 출격한다.

    ‘난세(亂世)에 영웅 난다’고 했던가. 원 균의 연이은 참패로 사태가 급박해지자 조정(朝廷)에서는 이순신을 다시 기용한 것이다. 이순신에게는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전황(戰況)은 너무나 열악하고 급박했다.

    이 때, 장군은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함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울 것입니다”라는 한 마디의 군인다운 다짐을 남긴다. 겨우 12척의 함선으로 왜군과 대결, 31척의 적함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다시 제해권을 회복하고, 우리 수군의 사기가 되살아났다.

    문득, 영국의 정치가 디스레일리(Disraeli, Benjamin : 1804 ~ 1881)의 “절망(絶望)은 어리석은 사람의 결론이다”라는 명언(名言)이 떠오른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함선으로 133척의 적함과 대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필승(必勝)의 군인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장군이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남해 어란포(於蘭浦)에 출현한 적함을 향해 출격하면서 장병들에게 던진 비장한 각오였다.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후, 1598년 1월 보화도(寶花島)를 거쳐 고금도(古今島)에 군진(軍陣)을 두었다. 이 곳에서 피난민들을 모아 농사를 짓게 하여 군량을 자급자족케 했다.

    이 해, 일본으로 돌아가던 적함 500여척이 우리 수군의 해로(海路) 차단으로 패주(敗走)의 길이 막히자 노량(露梁)으로 몰려왔다.

    11월 19일 오전 2시, 우리 수군은 노량 앞바다에 출격, 일제히 포문을 열고 공격을 개시했다. 이로써 두 나라의 병선 천여척이 어우러진 노량해전(露粱海戰)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두 나라의 수군은 전진과 후퇴를 거듭했다. 이순신은 선상(船上)에 올라 독전(督戰)하고 있었다. 아! 이게 왠 일인가. 하늘도 무심했다. 왜적의 흉탄(凶彈)이 이순신의 왼쪽 가슴에 날아들었다. 이순신은 이윽고 숨을 거두었다. 장군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지만, 독전은 계속되었다.

 

    장군은 숨을 거두면서 “싸움이 한창이니 내가 죽었단 말을 내지 말고 계속 싸우라!” 장군의 마지막 명령이 나의 가슴을 찡하게 한다.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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