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裕仁)에게 수류탄을 던지다
히로히토(裕仁)에게 수류탄을 던지다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10.22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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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로히토(裕仁)에게 수류탄을 던지다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지난 10일은 이봉창(李奉昌) 의사(義士)가 일본 도쿄(東京)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순국한 80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8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가 만주국 황제 부의(溥儀)와 도쿄 교외의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궁성(宮城)으로 돌아갈 때 사쿠라다문(櫻田門) 앞에서 히로히토를 향해 힘껏 수류탄을 던졌으나, 불행하게도 뜻을 아루지 못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해 10월 비공개로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고,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사형(死刑)이 집행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韓人愛國團에서 활약

     이봉창은 서울 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 점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런데, 일본인 주인은 한국인인 이봉창을 얏보기가 일수이고, 때로는 ‘조센징’이라는 굴욕적인 말을 하곤 했다. 이봉창은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이는 ‘나라를 빼앗긴 탓’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빼앗긴 나라를 찾는 일에 자기 한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1931년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김 구(金九)가 이끄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 항일운동(抗日運動)에 온몸을 던진다. 그가 애국단에 가입하면서 작성한 선서문(宣誓文)에 그의 애국충절이 배여 있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적국(敵國)의 수괴(首魁)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뿐만이 아니다. 상해 한인거류민단(韓人居留民團)에서 단장 김 구(임시정부 국무위원 겸임)와의 첫 만남에서 비장한 결심을 토로한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 하여도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 ‧ ‧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백범일지」에서). 이 말은 김 구를 크게 감동시켰다.

     이봉창은 그 해 12월 17일 일본 천황(天皇)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수류탄 2개를 몸에 숨기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나는 히로히토를, 다른 하나는 자신이 죽을 수류탄이었다. 그리고, 그는 도쿄 시내를 오가며 막노동 일을 하면서 기회를 살폈다. 그러던 중 히로히토가 요요기 연병장에서 있을 관병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날을 거사일로 잡는다. 그리고, 바로 상해의 김 구에게 “물품은 1월 8일에 방매하겠다”는 암호로 전보를 보냈다(「백범일지」에서).

     1932년 1월 8일, 히로히토를 암살할 기회가 왔다. 이봉창은 기회를 놓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인가! 그가 던진 수류탄이 빗나가고 말았다.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폭발한 수류탄은 히로히토를 비켜나가서 근위병(近衛兵)에게 부상을 입히는 데 그치고 말았다. 하늘이 그를 도우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나, 이봉창의 의거(義擧)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본인들의 간담을 오그라들게 하였다. 일본인들에게는, 1909년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하얼빈역에서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射殺)한 일, 1919년 강우규(姜宇奎) 의사가 사이또오 마코토(齋藤 實)에게 폭탄을 던진 일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2 ‧ 8 獨立宣言’이 있었던 그 도쿄에서

 

     어디 그 뿐인가. 1919년의 도쿄유학생들의 ‘2 ‧ 8 독립선언’이 있던 날 일본인들은 또 얼마나 놀랐던가. 2월 8일! 일본의 수도(首都) 도쿄에서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가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발족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지 않았던가. 그 날 오후 2시 정각,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발족대회의 막이 올랐다. 대회장에는 입추의 여지 없이 600여명의 일본 유학생들이 운집한 가운데 개회가 선언되었다. 여기서 최팔용(崔八鏞)이 역사적인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백관수(白寬洙)가 감격과 흥분에 찬 목소리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김도연(金度演)의 결의문 낭독이 이어졌다. “전항의 요구가 실패될 때에는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의 혈전(血戰)을 선포한다. 이로써 발생하는 참화(慘禍)는 우리 민족이 그 책(責)에 임(任)하지 않는다”는 결의문 낭독이 끝나자 침묵 속에 이를 지켜보고 있던 남녀 600여명의 유학생들은 우래같은 박수로 화답하였다. 그리고, 일본 국회에 보낼 한국독립청원서(韓國獨立請願書)를 만장일치로 가결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1932년 일본인들이 신(神)처럼 떠받드는 히로히토를 향한 한국 애국청년의 수류탄 투척은 또 한번 일본을 놀라게 했다.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비록 실패했지만, 대한청년의 기개(氣槪)를 세계만방에 널리 떨쳤다. 그리고, 한국인의 국권회복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었으며, 임시정부의 의열투쟁(義烈鬪爭)의 길에 힘을 보탰다.

     1932년 1월 8일, 그로부터 8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봉창 의사가 히로히토를 향해 힘차게 수류탄을 던지던 그 당당한 모습과 함께 그의 애국충절은 우리의 가슴에 뜨겁게 살아 있다.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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