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슈바이처’ 조병국
‘할머니 슈바이처’ 조병국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10.29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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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슈바이처’ 조병국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남을 도와준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어려운 우리의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의 빛이요, 희망이다.

 

    ‘密林의 聖者’ 슈바이처

    우리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베풀고 도움을 준 사람을 말할 때, 슈바이처(Schweitzer, A. : 1875 ~ 1965)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일찌기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던 그는 프랑스령(領) 적도(赤道) 아프리카(1960년 ‘가봉공화국’으로 독립)의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는, 그 곳으로 갈 것을 결심한다. 그는 신학자로, 연주자로 촉망 받던 자신을 뒤로 하고,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 설흔 살의 의대생(醫大生)으로 변신한다. 이것이 아프리카로 가기 위한 준비의 시작이었다.

    그의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가까운 친구들과 친척들은 야단이었다. ‘흑인을 위해 일하는 것은 그 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슈바이처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자나 깨나 질병(疾病)으로 고통받고 있는 흑인들을 잊지 않았다. 오로지 한 시라도 빨리 흑인들 곁으로 가서 그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그들에게 삶의 지혜와 용기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슈바이처는 이를 위해 길고 고된 6년여의 과정을 거쳐 의사가 되었다. 그가 37세가 되던 해였다. 이제 아프리카로 떠날 일만 남았다. 그는 부인 헬렌과 함께 아프리카 람베레네(Lambarene)에 정착, 병원을 설립하고 봉사활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슈바이처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슈바이처는 1965년 9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52년간 람바레네에서 흑인들을 위해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의료봉사와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1952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는데, 그 상금으로 나환자촌(癩患者村)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예수전(傳) 연구사(硏究史)」 ‧ 「문화와 윤리」 ‧ 「음악가 ‧ 시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하(Bach)」 ‧ 「사도(使徒) 바울의 신비주의(神秘主義)」 ‧ 「물과 원시림(原始林) 사이에서」 ‧ 「나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등의 많은 저서를 펴냈으며, 핵무기(核武器) 실험금지를 호소하는 등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헌신하였다.

    슈바이처. 그는 인류애(人類愛)를 실천한 ‘사랑의 천사(天使)’요, ‘밀림(密林)의 성자(聖者)’였다.

 

    여기 ‘할머니 슈바이처’가 있다

 

    요즈음, 50년간 ‘버려진 아이들’ 주치의(主治醫)로 살아온 할머니 의사가 세간(世間)의 이목(耳目)을 끌고 있다(조선일보 2012. 10. 20 ~ 21, B1 ~ B2 「김윤덕의 사람」). 화제의 주인공은 1961년부터 서울시립아동병원과 홀트아동병원에서 가정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어린이들을 진료하고 입양을 주선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던 조병국(79) 할머니이다. 조 할머니는 1993년 홀트아동병원 원장으로서 정년퇴임했지만, 그로부터 15년간 이 병원과 서울시립아동병원을 오가면서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서 청진기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장애아(障碍兒)들을 돌보고 있다.

   

    조 할머니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12년 삼성생명 공익재단이 수여하는 ‘비추미여성대상’(여성의 문화, 언론 및 사회공익 부문)과 파라다이스그룹이 수여하는 ‘파라다이스상’(사회복지 부문)을 수상했다. 또, 제7회 입양의 날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도 받았다. 주위로부터 상복(賞福)이 터졌다는 말을 듣자, “소아과(小兒科) 의사가 아이들 돌보는 건 당연한 데, 부모 없는 아이들 봐줬다고 칭찬하시나 봐요. 생(生)의 마지막이 다가오니 그런 것도 같고”라며 웃으셨다(위 조선일보, B1).

    조 할머니의 살아온 역정을 보면서 문득 유태인의 탈무드(Talmud)가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사람은 자기 보존과 더불어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 태어났다.”

 

    조 할머니는 지난 50년 동안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 살았다. “나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어요. 아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는 일로, 한 줌이라도 숨이 붙어 있으면 살려내는 일로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라요.” 조 할머니는 “아이도 아이지만 자궁(子宮) 수축이 되기도 전 출혈(出血)이 멈추지 않은 몸을 끌고 어디론가 도망쳤을 산모(産母)는 살아 있을까 걱정을 하고 그랬지요”(위 조선일보, B1).

    이것이 조 할머니가 의사로서 살아온 모습이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머리가 숙여지지 않을 수가 없다. 참으로 존경스럽다. 어디 이것이 필자만이겠는가.

    조 할머니는 지난 50년간 하루에 환자를 적게 보는 날에는 80명, 223명을 본 날도 있었다고 한다. 1972년에는 서울시립아동병원에 입원했던 3세 미만 아이들이 2,300명이나 되었다고 했다. 하루에 100명을 청진(聽診)하면 귀가 아파서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고 하니, 그의 고된 하루하루의 일과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추운 겨울, 그것도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병원으로 몰려들면 모두 조 할머니의 몫이었다. 조 할머니는 “일손이 모자라서 엄마처럼 하나하나 가슴에 안고 우유를 먹이지 못하고 기저귀로 머리를 괴고 젖병을 물려놓으면, 고개만 살짝 움직여도 젖병이 빠지곤 한다”고 지난 날의 고충을 털어놓았다(위 조선일보, B1).

 

    참으로 딱한 것은, 박봉(薄俸)에 일이 고되고 험하기 때문에 의사(醫師)들이 오래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조 할머니가 홀트일산복지타운에 오래 머물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기적’이라고 했다. “나라고 왜 떠나고 싶지 않았겠어요. 사람인걸. 그런데요, 참 희한하게도 그 때마다 과학하는 사람의 머리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지요”(위 조선일보, B1).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조병덕, 삼성출판사, 2009)의 곳곳에서 이런 ‘기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냥 기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어디서 온 기적이든 상관없었다. 세상의 낮은 곳, 버려지고 아픈 아이들이 모인 이 곳에 이왕이면 그 기적이라는 게 더 자주, 오래 머물기를 바랄 뿐이었다.”

 

    “엄마의 뱃속에선들 태희가 행복했을까. 아이를 가진 걸 원망하고 후회했을 어미의 자궁에서 열 달을 지내다가 내쫓기듯 태어나서는, 속바지에 둘둘 싸이고 주머니에 담겨 우리 병원에 오기까지 그 무기력한 생명체가 감담해야 했을 충격과 아픔은 얼마나 컸을까. ‧ ‧ ‧ 그들 하나하나가 바로 낮은 곳에서 피어난 희망이고 기적이다”(「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에서).

 

    그늘진 곳에서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는 조 할머니의 손을 거쳐간 6만의 입양아들에게 ‘희망’과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원한다.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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