多富洞 전투의 傳說, 白善燁 장군
多富洞 전투의 傳說, 白善燁 장군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11.0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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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富洞 전투의 傳說, 白善燁 장군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괴군(北傀軍)의 불법남침(不法南侵)으로 시작된 6 ‧ 25 전쟁은 밀고 밀리는 3년여에 걸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었다.

 

赤化野慾을 위한 不法南侵

 

    6 ‧ 25 전쟁은 1948년 북한(北韓) 정권의 수립과 동시에 선언한 ‘국토완정’(國土完整)에서 비롯되었다. 국토완정은 한반도(韓半島)를 북한체제(北韓體制)로 완전히 정리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1949년을 거치면서 점차 무력적화통일(武力赤化統一)로 굳어져 갔다. 이처럼 6 ‧ 25 전쟁은 북한 정권의 수립과 동시에 이미 계획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6 ‧ 25 전쟁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북괴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하여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우고 38선 전역에 걸쳐 일제히 남침을 개시하였다. 국군은 모든 전선(戰線)에서 물밀듯이 내려오는 북괴군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6 ‧ 25 전쟁. 우리는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갓 태어난 대한민국이 기틀을 채 갖추기도 전에 졸지에 당한 황당함이었다. 우리 국군은 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3일만에 수도(首都) 서울을 적(敵)에게 점령 당하고,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낙동강(洛東江)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포성(砲聲)에 놀라 새벽 단잠에서 깨어난 시민들도 짐을 꾸리고, 피난길에 올라야만 했다. 정처없이 그저 남으로, 남으로 피난길이 이어졌다. 더러는 맨몸인 채로, 더러는 보리쌀 두어되를 등에 메고 언제 돌아 올지도 모르는 그 길을 떠나야만 했다.

    정부는 수도 서울을 적에게 넘겨주고 대전(大田)으로, 대전에서 대구(大邱)로, 대구에서 부산(釜山)으로 옮겨야만 했다. 이러는 사이에 UN군 사령부가 창설되고,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이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반격(反擊)의 기회를 맞기도 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이 성공적으로 수행됨으로써 9월 27일에는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 기쁨을 누렸다.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UN군은 패주하는 북괴군을 쫓아 북진(北進)을 계속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10월 25일, 중공군(中共軍)이 개입하면서 다시 전세(戰勢)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국군과 UN군은 작선상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는 사이에 피아간(彼我間) 얼마나 많은 피해를 남겼던가. 한국군 사망 149,005명, 부상 717,083명, 실종 132,256명이었으며, 이 외에도 미군 사망 약 35,000명, 부상 약 100,000명에 달하였다. 북한의 인적 손실은 3백만명 이상이었는데, 당시 북한의 인구가 1천만명 정도였음에 비추어 볼 때 그 손실은 엄청난 것이었다.

    전쟁의 피해는 이 뿐이 아니었다. 우리 남한의 재산손실은 무려 20억 달러였다. 이 액수는 1949년 남한의 국민총생산액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3년 1개월 2일간의 最前線의 夜戰司令官

 

    이처럼 인적 ‧ 물적 피해를 남긴 3년여에 걸친 6 ‧ 25 전쟁에서 백선엽 장군 은 불멸의 전설을 남겼다. 그는 6 ‧ 25 전쟁 3년 1개월 2일 17시간의 전쟁기간 동안 전(全) 기간을 최전선의 야전사령관으로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한국군 최초의 4성(四星) 장군, 낙동강 전선(戰線)의 사수(死守), 다부동(多富洞) 전투의 살아 있는 전설, 1950년 10월 19일 오전 10시 50분 평양(平壤)에 1착으로 입성한 부대장, 6 ‧ 25 전쟁의 산 증인, 한국군 최초의 제1야전군 사령관, 휴전회담 초대 한국대표. 이 모두가 그를 상징하는 단어들이다.

 

    6 ‧ 25 전쟁 중 다부동 전투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다부동은 대구 방어에 있어서 중요한 전략의 요충지요, 대한민국의 마지막 보루였다. 대구에서 북쪽으로 22km 거리에 있었다. 따라서, 다부동 방어선이 무너지면 대구가 적의 포(砲) 사정거리(射程距離) 안에 들어가게 된다.

    국군 제1사단은 다부동 전투를 반드시 승리로 이끌어야 했다. 사단장 백선엽의 각오는 남달랐다.

 

    백 장군은 부대원들을 향해 “지금까지 정말 잘 싸웠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저 아래에 미군들이 있다. 우리가 밀리면 저들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백선엽 장군의 6 ‧ 25 전쟁 이야기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권에서).

    그리고, 백 장군은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는 비장한 돌격명령을 내리고, 부대의 최선두에 서서 적진(敵陣)을 향해 앞으로 진격해나갔다.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 장군이 보인 군인다운 참 모습이었다.

    “부산 교두보로 불리우는 이 다부동 전투에서 백 장군의 인내와 불굴의 투지로 적을 굴복시키고, 반격과 인천상륙작전의 계기를 만들었다.” 이는 백 장군과 함께 다부동 전투에 참전했던 김점곤(金點坤, 당시 육군 제1사단 12연대장 ‧ 대령)이 백 장군의 회고록 『군(軍)과 나』의 「말미(末尾)에 부치는 글」(‘자신의 노력으로 쌓아올린 입지적 인물’)의 일부이다.

    이 글에서 “백 장군의 제1사단은 임진강 전선에서, 적의 수도 진입을 끝까지 저지하였고 서울이 함락된 후에는 거의 맨손으로 한강을 도하하였다. 그 후 시흥에서 재편성한 소총만의 사단은 수원 부근의 풍덕천 전투로부터 낙동강에 이르기까지 끈질긴 접전으로 적의 남하를 지연시키면서 최후의 방어선인 다부동에 이른다”라고 적고 있다.

    김점곤은 이를 두고, “백 장군이 6 ‧ 25 직전에 숙명의 제1사단으로 임명된 데에는 그의 인품과 군인으로서 투혼의 일면을 잘 설명해 주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고 적고 있다. 김점곤의 다음의 글에서 백 장군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백 장군은 지휘관으로서 부하에게 진두지휘와 충직과 노력을 수범하였고, 애정과 성의로 대함으로써 그들로부터 최대의 충성과 전과를 얻었다.”

 

    필자는 이런 글을 통해서 평소부터 백선엽 장군의 6 ‧ 25 전쟁에서의 투혼(鬪魂)과 전과(戰果)가 참으로 값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10월 국회 국방위 국정감사에서 참으로 놀라운 발언이 있었다. 민주통합당 K 의원(31)은, 백 장군이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에서 소위로 근무했었다는 사실을 내세워, “잘못된 과(過)를 가지고 있는 이 민족 반역자가 대한민국 국군 지도자로 설 수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조선일보 2012. 10. 22, 「기자수첩」)라는 말을 쏟아냈다.

    백 장군은 ‘간도특설대 소위로 임관하여 주로 중공 팔로군을 격퇴하는 데 활동했을 뿐 독립군을 토벌한 적은 없다’고 여러 경로를 통해서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간도특설대 소위로 임관한 사실을 들어 ‘6 ‧ 25 전쟁의 영웅’을 민족 반역자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백 장군이 6 ‧ 25 전쟁때 가장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에서 세운 전과는 미국 군사학교 교재에도 소개되고 있으며, 더욱이 참전(參戰) 미군들은 백 장군을 ‘살아 있는 6 ‧ 25 전쟁의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영웅을 모독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K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말한 ‘민족 반역자’라는 막말을 떠올리면서, 백 장군이 다부동 전투에서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는 돌격명령을 다시 한 번 되내어본다.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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