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다스리지도 못하면서 먹고 마시기만 하면마음이 편할 것인가
잘 다스리지도 못하면서 먹고 마시기만 하면마음이 편할 것인가
  • 김철웅 연구교수
  • 승인 2012.11.08 16:53
  • 호수 13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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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안정복·조국인 『목천현지(木川縣誌)』
▲『목천현지』에 실린 목천 지도.

63. 안정복·조국인 『목천현지(木川縣誌)』

잘 다스리지도 못하면서 먹고 마시기만 하면마음이 편할 것인가

 

2012년 4월 30일에 한성백제박물관이 개관했다. 백제의 시조 온조는 한강 유역의 ‘하남 위례성’에 첫 도읍을 정했는데, 이곳은 나중에 ‘한성’이라 불렸다. 그 동안 ‘하남 위례성’이 어디인지 이견이 분분했다. 한때는 몽촌토성, 남한산성, 경기도 광주 일대가 하남 위례성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1997년 이후 풍납동에서 백제 초기의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풍납동토성이 위례성일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더구나 송파구 방이동에는 백제 초기 양식의 무덤들도 있어 ‘하남 위례성’이 이곳에 위치했다는 주장이 점차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울시에서는 올림픽공원 안에 한성백제박물관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박물관의 개관에도 불구하고 반론도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있다. 2009년에는 충남의 ‘직산 위례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다. 그 이전에도 하남 위례성이 직산과 목천 사이에 있는 성거산이라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목천현지(木川縣誌)』이다.


  목천은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이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대록군으로 고쳐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목주로, 조선시대에는 목천현이 되었다. 일제시대인 1914년에 목천면이 되었다가 2002년에 목천읍이 되었는데 행정구역 상 천안시에 속해 있다. 이 지역에 대한 기록은 오래 전부터 정리되고 있었는데 1779년(정조 3)에 안정복이 『대록지(大麓誌)』를 지었고, 후에 현감 조국인이 이를 증보하여 1817년(순조 17)에 『목천현지』를 간행하였다. 책의 본문에서 안정복의 『대록지』에서 추가된 내용을 ‘속’·‘증’이라 하였다. 서두에 안정복이 쓴 『대록지』 서문과 증보할 때 쓴 조국인의 서문이 있다. 이어 목천현의 산천과 주요 시설을 표시한 그림 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내용은 고을의 연혁·관원·풍속·산천·토산·인구·학교·인물·고적 등 34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혁」과 「고적」 조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백제 초기의 도읍지 위례성의 위치를 목천 지방으로 단정하였다. 위례의 옛 성(慰禮古城)이 성거산에 있고 유왕동(留王洞)은 온조가 위례에 도읍을 정하고 있을 때 농사를 짓던 곳이라고 기술하였다. 「성씨」에서는 이곳을 대표하는 인물로 김시민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1554년(명종 9)에 목천현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아주 뛰어난 자질이 있었다고 한다. 1578년(선조 11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당시 진주판관으로 있으면서 진주성을 지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진공」은 진상품으로 바치는 이 고장의 물품을, 「교원」은 향교와 도동서원을 기록하였다.

도동서원은 1649년(인조 27)에 정구·김일손·황종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으며, 1676년(숙종 2)에 사액사원이 되었다. 「전결」에서는 토지의 규모를, 「창곡」에서는 군량미, 구휼미 등 각종 미곡의 수량을 정리하였다. 「호구」는 1768년(영조 44)에 3,321호였고, 1816년에는 3,345호였다. 역대 현감을 기록한 「읍선생안」은 1558년부터 1813년에 부임한 조국인까지 125명을 수록하였는데, 이 중 1776년에 부임한 안정복까지는 『대록지』에 있던 것이다. 이처럼 『목천현지』는 내용이 매우 상세하고 풍부하여 19세기 초기까지 목천현의 지역 사정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목천현감으로 있으면서 『대록지』를 편찬한 안정복은 불합리한 현실을 개혁하려고 노력한 실학자였다. 성호 이익을 스승으로 모신 그는 목천현감으로 있으면서 선정(善政)이 빛을 발했다. 부임해서 “백성을 사랑하는 뜻에 부응하고 백성을 수탈해 자신을 살찌우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엄한 명을 내려 부정부패를 없애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안정복의 청렴함과 검소함은 남달랐다. 안정복은 손님을 맞아 함께 식사를 할 때면 항상 너무 적게 먹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본래 안정복은 적게 먹는 편이었지만, 우스갯소리로 “잘 다스리지도 못하면서 먹고 마시기만 하면 마음이 편할 것인가. 그래서 적게 먹는다네”라고 했다. 안정복이 떠난 뒤 목천 사람들은 ‘떠난 목민관을 그린다’는 뜻의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김철웅(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김철웅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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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m9963@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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