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砲隊의 猛將, 洪範圖 將軍
山砲隊의 猛將, 洪範圖 將軍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11.12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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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砲隊의 猛將, 洪範圖 將軍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말미암아 반일감정(反日感情)이 격화되면서 의병항쟁(義兵抗爭)으로 이어졌다. 이에 더하여 의병항쟁에 불을 붙인 것은 단발령(斷髮令)이었다. 이 무렵, 의병항쟁의 중심은 춘천(春川) ‧ 강릉(江陵) ‧ 안동(安東) ‧ 진주(晋州) ‧ 충주(忠州) ‧ 홍주(洪州) ‧ 나주(羅州) 등이었다.

    이 때, 청년 홍범도(洪範圖)도 그 해 11월 강원도 회양(淮陽)에서 의병에 가담하게 된다. 이것이 홍범도의 의병활동의 시작이었다.

    여천(汝千) 홍범도가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시작한 것은 1907년이었다. 홍범도는 1907년 전국적으로 의병(義兵)이 일어나자 그 해 11월 함경남도 갑산(甲山)에서 척왜(斥倭) ‧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높이 들고, 차도선(車道善) ‧ 태양욱(太陽郁) ‧ 송상봉(宋相鳳) ‧ 허 근(許瑾) 등과 함께 산포대(山砲隊)를 조직, 왜군(倭軍)의 척결에 앞장섰다.

 

    義兵史에 유명한 山砲隊의 出現

 

    1907년 9월, 일제(日帝)가 전국적으로 파급되고 있던 민중의 의병항쟁(義兵抗爭)을 봉쇄하기 위하여 ‘총포 및 화약류단속법’을 공포하고, 산수(山水) ‧ 갑산 지방 포수(砲手)들의 총포(銃砲)를 회수하려고 했다.

    홍범도의 산포대는 이에 순순이 응하지 않았다. 산수 ‧ 갑산 ‧ 혜산(惠山) ‧ 풍산(豊山) 등지에서 총포를 회수하려 온 일본군에게 유격전(遊擊戰)으로 맞섰다. 이 싸움에서 홍 장군은 9시간의 전투 끝에 적을 전멸시켰는데, 이 때 그에게는 의병수괴(義兵首魁) ‧ 독립운동의 영도자(領導者) ‧ 배일불령단체(排日不逞團體)의 영도자라는 명예로운 칭호가 붙게 되었다. 어디 그 뿐이었던가. 홍범도의 신출귀몰한 전술과 전략에 놀란 일본군은 그를 가리켜 ‘날으는 홍범도’라고도 불렀다.

 

    1910년 한일병합(韓日倂合)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홍 장군은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滿洲)를 거쳐 연해주(沿海州)로 건너간다. 이 곳 연해주는 당시 한국독립운동의 근거지였는데, 그는 이 곳에서 독립군(獨立軍)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다음 해, 부하 박영신(朴永信)으로 하여금 함경북도 경원(慶源)의 일본군 수비대(守備隊)를 습격토록 하였는데, 첫 전투에서 큰 전과(戰果)를 거두었다.

 

    홍 장군은 1919년 8월에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의 총사령이 되어 4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잠입하여 갑산 ‧ 혜산 등지에서 일본군을 급습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그 무렵 자성(慈城) ‧ 강계(江界) ‧ 만포진(滿浦鎭) 전투에서 일본군 7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었는데, 이로써 일본군의 전투기능을 마비시켰다.

    그리고, 1920년 6월 4일,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의 독립군이 함경북도 종성군(鐘城郡) 강양동(江陽洞)에 진입하여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하여 타격을 입혔으며, 다음 날 일본군 1개 소대 병력이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해오자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의 독립군이 삼둔자(三屯子)에서 이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에 격분한 일본군은 함격북도 나남(羅南)에 주둔해 있는 제19사단에 월강추격대(越江追擊隊)를 편성하여, 독립군의 본거지인 길림성(吉林省) 봉오동(鳳梧洞)으로 공격해왔다.

 

    鳳梧洞 戰鬪를 승리로 장식하다

 

    일본군이 반격해온 것은 1920년 6월 7일이었다. 홍 장군은 대한독립군을 이끌고 맹렬히 공격해오는 일본군에 맞서 강력한 진공작전(進攻作戰)을 펼쳤다. 홍 장군이 이끈 대한독립군은 최진동(崔振東)이 이끈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안 무(安武)가 이끈 국민회군(國民會軍)이 연합하여 결성된 대한북로독군부와 한경세(韓景世)가 이끈 대한신민단의 독립군과 연합하여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가 이끈 제19사단을 대파시키고 승리를 거두었다.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은 홍 장군의 공격명령에 따라 동 ‧ 서 ‧ 북 3면에서 일본군을 협공하여 크게 승리할 수 있었으며, 독립군의 강인한 독립정신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봉오동 전투는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중국 영토에서 벌어진 최초의 전투로서, 그 규모가 대단히 큰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수많은 병력의 손실을 당한 일본군은 더 이상 싸우지 못하고 퇴각하고 말았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되면서 대일(對日) 독립전쟁은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해 9월에는 일본군이 김죄진(金佐鎭) ‧ 이범석(李範奭) 장군 등이 거느린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하여 청산리(靑山里)로 공격해왔다. 이 때, 홍범도 장군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제1연대장으로서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여 큰 전공(戰功)을 세운 바도 있다.

 

    그 후, 홍 장군은 흑룡강(黑龍江)의 국경지대에서 항일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그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1921년에는 러시아령(領) 흑하자유시(黑河自由市)로 이동하여 스랍스케 부근에 주둔, 레닌(Lenin, N.) 정부의 협조를 얻어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연해주에서 집단농장을 건설하여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렸다.

    그러나, 홍 장군의 이러한 꿈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37년 9월, 스탈린(Stalin, J.)의 한인(韓人) 강제이주정책에 의하여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Kazakhstan) 크질오르다(Kzyl-Orda)로 옮겨가게 되었다.

    홍 장군은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3년 10월 25일 이국(異國)의 땅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一期)로 생애를 마쳤다. 홍 장군은 가셨지만, 그가 남긴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정신은 우리의 가슴에 살아 있다. “‧ ‧ ‧ 아(我) 대한독립을 세계에 선포한 후 상(上)으로 임시정부가 유하야 군국대사를 주하며, 하(下)로 민중이 단결하여 만세를 제창할 새 ‧ ‧ ‧ 국토를 회복하야 자손만대에 행복을 여(與)함이 아(我) 독립군의 목적이오 또한 민족을 위하는 본의라”(대한독립군 총사령으로서 홍 장군이 공포한 諭告文 중에서).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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