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묵처방] 순결, 고귀한 가치의 상대성
[백묵처방] 순결, 고귀한 가치의 상대성
  • 허재영(교육대학원·교육학과) 교수
  • 승인 2012.11.15 13:08
  • 호수 13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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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언어이든지 고급스러운 말이 있고, 이와 대립되는 비어와 속어가 있다. 사회언어학적 관점에서 비속어를 연구할 때 흥미롭게 느끼는 점 가운데 하나가 비속어 생성 과정의 보편성이다. 어느 나라 말이든지 사람보다 못한 존재라는 뜻에서 ‘짐승’과 비유한 말은 비속어가 된다. 예를 들어 『역어유해』에 등장하는 ‘나귀(驢養的: 나귀의 새끼)’,나 ‘가희(狗娘的: 개의 종자)’는 ‘매욕(罵辱)’의 대표적인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런 표현은 현대 국어나 영어도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말의 비속 표현 가운데 ‘화냥년’이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이 ‘환향(還鄕)’에서 온 말로 알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 이후 원나라에 끌려갔던 고려의 여인이 정조를 잃고 고향에 돌아와 천대 받던 일과 연관 지어 해석한다. 그런데 이 해석에는 좀 무리가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고려사』에 나타나는 혼인 관계를 살펴보면 고려시대에는 성리학적 정조 관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간신으로 기록된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관계나 무신난 시대의 이의방이나 이의민 등의 사생활을 살펴보면 이 시기 성리학적 윤리관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기에 일부 사람들은 조선 중기 청의 침입 이후 ‘환양(還陽)’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화냥’이 ‘환향’이나 ‘환양’에서 비롯된 말이 아님은 분명하다. 연변의 어원학자 한진건은 ‘화냥’의 어원설을 종합하면서도, 이 말의 유래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화냥’을 ‘환향’에 결부하는 것은 민간 어원이기 때문이다. 민간 어원은 민간의 속설을 바탕으로 한다. 달리 말해 민중들이 그럴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신념 체계가 없다면 민간 어원은 성립되지 않는다. ‘화냥’이 ‘환향’과 결부될 수 있었던 것은 몽고나 청의 침입이라는 역사적 아픔과 성리학적 정조 관념이 합쳐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정조 관념이나 순결 관념이 신분이나 남녀 차별에 따른 억압적 메커니즘에 의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각시(閣氏) 나의 첩이 되나 내가 각시의 후(後) 남편이 되나 꽃 본 나비 물 본 기러기 고기 본 가마오지 가지의 젖(이 부분은 비속 표현)이오 수박에 딸린 쪽술(이 부분은 비하 표현)이로다. 각시 내 하나 수철장(쇠그릇을 만들던 사람)의 딸이오니 짐쟁이로 솥 짓고 남은 쇠로 칭칭 감아질까 하노라.” 이 시조는 영조 연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악학습령』에 나타나는 작품이다. 우리의 고정관념과는 달리 성리학 시대에도 사랑의 정서는 보편적이다.

심리학자 셀러가 ‘지속적 가치’, ‘목적적 가치’, ‘만족도가 큰 가치’가 그렇지 않은 가치들에 비해 우월하다고 설파했듯이, ‘순결’의 가치가 ‘불결’의 가치보다 우월함은 틀림없다. 이 점에서 ‘혼전 순결’을 유지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우월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 다만 개인적인 질투나 억압 메커니즘이 발현되어 잃어버린 순결을 죄악으로 간주하게 된 것은, 영채가 배 학감에게 순결을 잃고 죽음을 결심하는 스토리로 주인공 이형식의 자책감을 경감해 주고 싶었던 이광수의 『무정』 이후에 등장한 것은 아닐지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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