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의 음식인문학 21.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와 착한 음식
김주언의 음식인문학 21.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와 착한 음식
  • 김주언(교양기초교육원) 강의전담교수
  • 승인 2012.11.15 19:48
  • 호수 13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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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움의 음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중략)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 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백석,「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 복이 있고, 통하는 자 복이 있고, 온유한 자 복이 있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복이 있고 하는 식으로 팔복(八福)을 말한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윤동주는 「八福」이란 제목으로 이 말씀을 비틀어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만을 여덟 번 반복한 끝에 마지막 행에서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끝맺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태석 신부는 「묵상」이란 찬송에서 십자가 앞에 꿇어 눈물을 흘리면서 묻는다.

 선량한 사람들이 추우면 추운 대로 찬 물에 손을 담그고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노동을 바치고, 저마다의 운명을 끌어안고 묵묵히 저녁을 먹는다. 이 가닿을 수 없는 풍경을 객수(客愁)의 그리움으로 그려보며, 슬픔을 내리는 하늘의 뜻을 자기 운명의 편에서 읽어내고 싶어하는 시인은 아직 삶을 살고 싶은 자이다. 그런데 착한 것들은 왜 저렇게 쓸쓸하고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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