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땅에서 죽어야 합니다
우리 땅에서 죽어야 합니다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11.20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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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에서 죽어야 합니다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불가(不可)합니다. 대가(大駕)가 조선(朝鮮) 땅에서 한 걸음이라도 나가면 조선은 이미 우리 땅이 아닙니다.” 이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왜군(倭軍)을 피해 명(明) 나라로 피란길을 재촉하는 선조(宣祖)에게 한 말이다.

 

    宣祖는 都城을 버리고 義州로

 

    참으로 급박한 상황이었다. 1592년(宣祖 25년) 4월 13일 새벽, 왜군이 침공해왔지만 전국은 무방비 상태였으며, 관군(官軍)은 패전에 패전을 거듭했다. 왜장(倭將)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병선(兵船) 700여 척을 이끌고 부산포(釜山浦)에 이르러 큰 저항 없이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을 궤멸시키고, 그 이튿날에는 부산을 빼앗고 동래(東萊)를 거쳐 동 ‧ 중 ‧ 서 3로(三路)로 나누어 서울을 향해 북상(北上)했다.

    부산 첨사(僉使) 정 발(鄭撥)과 동래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온몸으로 저항했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4월 14일에는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성(城)을 에워싸고 공격을 가해 왔다. 이 때 성 안에서는 저항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함락되었으며,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박 홍(朴泓)은 싸워보지도 않고 병영(兵營)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다.

    4월 18일, 이런 무방비 상태에 있는 부산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제2진 2만여의 병력이 몰려들었다. 어디 그 뿐인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진 1만여의 병력이 다대포(多大浦)를 거쳐 김해(金海)로 진격해 왔다. 관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명장(名將)으로 추앙받던 신 립(申砬) 장군도 깃발을 휘날리고 창검을 번득이며 다가오는 적의 예봉을 꺾지 못하고, 탄금대(彈琴臺)에서 최후를 마쳤다. 신 립의 패배는 큰 충격이었다. 충주는 영남과 서울을 통하는 군사적 요충지이므로, 충주 싸움의 패배는 서울을 적에게 내주는 꼴이 되고 말기 때문이었다.

    이 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고, 유극량(劉克良)과 변 기(邊璣)를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각각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을 지키게 하였지만, 한 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물러서고 말았다.

 

    이리하여 왜군 제1진은 물밀듯이 진격하여 서울에 이르렀다. 그 날이 5월 2일이었다. 왜군 제1진이 부산을 침공한지 20일이 채 되지 않아서 서울을 점령했다. 여기에 이르는 동안 우리 관군은 전투다운 전투를 한번도 하지 못했다.

    서울에 진격한 왜군 제1진은 평안도로, 제2진은 함경도로, 제3진은 황해도로 진군을 계속했다. 제1진은 임진강(臨津江)을 건너 개성(開城)에 다달고, 그들은 내친김에 평양(平壤)으로 진격했다. 그 날이 6월 16일이었다. 관군은 파죽지세로 몰려드는 왜군에게 무방비 상태로 국토를 내주고 말았다.

 

    피란가기에 바쁜 선조임금이었다. 선조는 난을 피하여 개성 ‧ 평양을 거쳐 의주(義州)에 행궁(行宮)을 차렸다. 그리고, 두 왕자(王者) 임해군(臨海君)을 함경도로, 순화군(順和君)을 강원도로 보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케 하였지만, 백성들은 조정(朝廷)의 무능에 분격하면서 모병에 응하지 않았다.

 

    柳成龍을 都體察使로 임명하다

 

    이것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의 조선(朝鮮)의 모습이었다. 나라가 왜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임진왜란 이전에도 왜구(倭寇)들의 잦은 침략이 있었으므로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하여 이에 대비하였으나, 지배계급의 당파(黨派)를 중심으로 한 반목(反目) 때문에 실효성이 없었다. 이러한 파쟁(派爭)으로 국방정책(國防政策) 조차 마련하지 않고 있었다. 훈련된 군대도 없었고, 정보체계도 억망이었다.

    어디 그 뿐이었던가. 1950년 3월, 일본의 정세(情勢)를 탐색하기 위하여 황윤길(黃允吉)을 정사(正使)로, 김성일(金誠一)을 부사(副使)로 한 통신사(通信使)를 일본에 파견하였는데, 이들의 행태는 또 어떠하였던가.

    이듬 해 3월에 이들이 선조에게 복명(復命)한 내용은 참으로 어이가 없다.

    황윤길 왈,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일본의 침략을 아뢰었다. 김성일은 “신(臣)은 그러한 정세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황윤길이 인심(人心)을 동요시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라고, 반대의 의견을 아뢰었다.

    선조가 다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모습을 묻자, 황윤길은 “그의 두 눈에서 빛이 나는 것으로 보아 담력이 있고, 꾀도 많아 보였습니다”라고 하자,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았는데,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황윤길은 서인(西人)이요, 김성일은 동인(東人)었으니, 일본의 위협에 대해서도 동인 ‧ 서인의 당파에 매달려 마찰을 빚었던 것이다.

    아! 이를 어찌하랴! 그 때 조선의 조정은 동인 세상이었다. 서인인 황윤길의 말에는 누구 한 사람 귀 기울리지 않았다. 오로지 김성일의 불침설(不侵說)이 힘을 얻고 있었다. 이것이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당시 조선 조정의 암담한 현실이었다.

 

    순변사 이 일이 문경(聞慶)에서 보낸 장계(狀啓)가 그 때의 전황(戰況)이 매우 심각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번의 적군은 신병(神兵)과도 같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당해 내지 못합니다. 신(臣) 또한 죽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을 듯 합니다.”

    이 지경에 이르자 나라의 민심(民心)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개성을 눈 앞에 둔 동파(東坡)에 머물고 있는 선조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중신(重臣)들을 불러놓고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어디로 간단 말인가?”를 되풀이했지만, 해답이 없었다.

    선조는 불안과 공포를 넘어 절망에 이르렀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야 할 것인가? 선조의 속내는 ‘명(明) 나라에 내부(內附)하는 것’이었다. 나라가 망하더라도 자기 살 길을 찾겠다는 선조의 어이 없는 태도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불가합니다. 어찌 나라를 버리고 압록강을 건넌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임금께서 조선 땅에서 한 걸음이라도 떠나시면 그 때부터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닙니다.” 류성룡은 단호했다. 이 한 마디의 직언(直言)은 조선을 있게 한 결정이었다.

 

    류성룡은 이 일로 선조의 눈 밖에 벗어난다. 그러나, 전세(戰勢)가 급박해지자, 4월 20일 좌의정(左議政) 류성룡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한다. 도체찰사는 전선(戰線)의 총사령관이었다.

    도체찰사 류성룡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병조판서(兵曹判書) 김응남(金應南)을 부체찰사(副體察使)로 삼아 전선을 둘러보고 관군을 독려하지만, 일은 여의치 않았다. 싸움터에 나갈 병사(兵士)가 있어야지. 그 뿐이 아니었다. 군인을 먹일 군량(軍糧)도 없었다. 이것을 해결하는 일은 모두 류성룡의 몫이었다. 콧대 높은 명군(明軍)을 달래고 어루만지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류성룡의 혜안(慧眼)은 번득였다. 그는 일본의 움직임을 수상히 여겨 1591년 7월 형조정랑(刑曹正郞) 권 율(權慄)을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정읍현감(井邑縣監) 이순신(李舜臣)을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천거하여, 전쟁에 대비케 하였다. 권 율의 행주산성대첩(幸州山城大捷)에 의한 서울의 수복, 이순신의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에 의한 제해권(制海權)의 회복은 참으로 큰 수확이었다. 권 율과 이순신, 이 두 장군이 없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권 율과 이순신을 천거한 류성룡의 판단은 역사에 길이 남을 빛나는 대목이다. 권 율은 육지를, 이순신은 바다를 철통같이 지키면서 왜군들의 가슴을 철렁 내려안게 했다. 두 장군은 가는 곳마다 승전보(勝戰譜)를 울리면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내지 않았던가.

 

    ‘난세(亂世)에 영웅 난다’고 했던가. 류성룡은 임진왜란이라는 난세에서 나라를 구한 명재상(名宰相)이다. 그는 영의정(領議政)으로서 도체찰사를 맡아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생각나게 하는 인물이 바로 류성룡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그의 『징비록』(懲毖錄)을 읽는다.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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