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의 음식인문학 22.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과 두부
김주언의 음식인문학 22.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과 두부
  • 김주언(교양기초교육원) 강의전담교수
  • 승인 2012.11.21 15:30
  • 호수 13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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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새로운 출발의 의식

차의 문이 열리면서 조카인 듯한 사람이 뛰어나오더니 빠른 걸음으로 마주 다가왔다.
삼촌……
그는 먼저 나를 힘껏 껴안았다.
고생 많으셨지요.
뭐…… 잘 지낸 편이다.
그가 비닐봉지에서 두부를 꺼내어 내 얼굴에 들이밀었다.
이거 잡수세요. 어머니가 꼭 드시게 하라구 그러셨어요.
두부…… 거 다 미신이다.
이제부턴 남들이 하는 것처럼 하셔야 된대요.
나는 그게 누님의 진심이라고 알아들었다. 두부는 차갑고 싱겁고 뻑뻑해서 목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조카가 승용차 뒷문을 열어주었다.
 ― 황석영,「오래된 정원」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본 작가인데, 그는 자신의 소설 속에 음식을 자주 등장시키는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음식을 자주 출현시킬 뿐만 아니라 음식 요리 자체를 즐기기도 한다는 이 남자에게 두부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다. 그에 의하면 가장 맛있는 두부는 섹스 후에 먹는 것이라고 한다. 하루키의 이 독특한 취향은 그러나 한국의 작가들에게, 특히 감옥에 다녀온 황석영 같은 작가에게는 따라하기 힘든 이상한 행복이거나 개그일지도 모른다. 감옥의 문지방을 넘어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통과의례로 두부를 먹는, 아니 삼키는 황석영의 인물, 저 오현우를 보라.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황석영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임상수의 「오래된 정원」의 엔딩자막에는 나윤선이 부르는 노래 「사노라면」이 천천히 흐른다. 노래는 결코 씩씩하지 않다. 숙연한 슬픔은 슬픔 이외의 잡것들을 침묵시키며 순전히 슬픔의 힘만으로 희망을 일으켜 세우고자 한다. 그가 몸바친 한 시대가 돌이킬 수 없이 저물어 버렸는데 “사노라면 언젠가는” 주인공 오현우에게도 과연 좋은 날은 올 것인가.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이라고 하지만, 시국사범 장기복역수로 인생의 황금기를 고스란히 감옥에서 보내고 지금 두부를 먹으며 출옥하는 그는 더 이상 젊지도 않다. 그는 대체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음식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황석영의 텍스트에는 이런 대목도 등장한다. “나는 다시 먹을 것으로 돌아가마. 아름다운 젊은이 예수가 처음에 출발했던 이상으로 돌아가는 길이 무엇이었겠어? 땅에서 가장 소박하고 욕심없는 식사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지상의 양식으로써.” 이 대목(하권,190쪽)은 앞서 인용한 출소하면서 두부를 먹는 장면(상권,17쪽)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가까이 붙여 놓고 읽어볼 수도 있다. 그러면 두부는 순결한 지상의 양식이 되어 후일담이 갖는 불가항력적인 무기력증을 한결 가볍게 만드는 것 같다. 주인공의 탈감옥 시대가 두부로써 열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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