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平等을 실천한 獨立運動家, 李會榮
人間平等을 실천한 獨立運動家, 李會榮
  • 권용우<명예교수‧법학>
  • 승인 2013.02.04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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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人間平等을 실천한 獨立運動家, 李會榮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오는 3월 17일(음력)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선생이 태어난 날이다. 그는, 1867년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이유승(李裕承)의 6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리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그의 10대조이고, 오천(梧川) 이종성(李宗城)이 5대조이다.

     이 뿐이 아니다. 영조(英祖) 때 영의정(領議政)으로 탕평책(蕩平策)을 주도했던 이광좌(李光佐)도 경주이씨(慶州李氏) 가문(家門)의 거목이었다.

 

   名門家의 後裔, 抗日鬪爭에 뛰어들다

 

     이런 명문가의 이회영은 모든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1910년 12월 하순 온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류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망명의 길을 떠난다. 그는 조국을 떠나면서 “우리 형제가 당당한 명문호족(名門豪族)으로서 차라리 대의(大義)가 있는 곳에서 죽을지언정 왜적치하(倭敵治下)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이는 짐승과 다르겠는가?”라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중에서).

     한일병합(韓日倂合)이 되면서 국내에서는 일본의 감시가 심하여 독립운동의 전개가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이회영은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독립운동의 기지(基地) 마련을 위해 만주로 옮겨가야만 했다.

     이회영은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해서 ‘힘을 길러야 한다’는 일념을 가슴에 안고, 산 설고 물 설은 이국(異國) 땅에 다달은 것이다. 고행(苦行)의 시작이었다.

 

     이회영은 1911년 4월 이 곳 삼원보에서 이동녕(李東寧) ‧ 이상룡(李相龍) ‧ 주진수(朱鎭洙) 등과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초대 사장에 석주(石洲) 이상룡을 추대한다. 이회영은 경학사의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어떤 자리도 사양했다. 자신을 내세우려하지 않는 겸양의 덕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동생 이시영(李始榮)도 경학사의 설립에 합류했다.

     경학사는 청년들에게 농업을 장려하여 이 곳 한인(韓人)들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독립사상(獨立思想)을 심어주는 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회영은 경학사 설립을 마친 후 이동녕 ‧ 이상룡 ‧ 이시영 등과 함께 군사훈련을 위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 초대 교장 이동녕, 新興武官學校의 전신)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이회영의 둘째 형 석영(石榮)과 셋째 형 철영(哲榮)도 강습소 설립에 큰 힘을 보탰음은 물론이다.

     강습소의 명칭을 ‘신흥’(新興)이라고 한 것은 신민회(新民會)의 ‘신’(新)자와 나라를 다시 일으킨다는 뜻으로 ‘흥’(興)자를 조합한 것이라고 한다.

     이 때, 오광선(吳光鮮) ‧ 신팔균(申八均) ‧ 이범석(李範奭) ‧ 윤경천(尹敬天) 등이 교관으로 활동했는데, 1920년 8월까지 2,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졸업생들은 청산리(靑山里)전투와 봉오동(鳳梧洞)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을 대파하는 큰 전과(戰果)를 올리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훗날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을 조직하여 만주지방의 독립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김명섭 『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 중에서).

     이회영의 이러한 노력은 신규식(申圭植)의 동제사(同濟社)를 통한 외교적 노력과 조화를 이루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敎育救國에 힘쓴 아나키스트였다

     이회영은 무력에 의한 조국의 독립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그는 조국이 일본에 짓밟히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신문물(新文物)에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1906년 9월 안창호(安昌浩) ‧ 이 갑(李甲) ‧ 전덕기(全德基) ‧ 양기탁(梁起鐸) ‧ 주진수 ‧ 이동녕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애국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1908년에는 이동녕 ‧ 안창호 ‧ 박중화(朴重華) 등과 무실역행(務實力行)을 행동강령으로 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이는 신민회의 자매단체인 항일청년운동단체로서 전국의 유능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그들을 항일애국청년으로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국권회복운동의 중심에 청년들이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회영은 서울 상동교호(尙洞敎會) 안에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을 열고 그 학감으로서, 또 장훈학교(長薰學校)를 설립하여 청년교육에도 힘썼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동녕 ‧ 이상설(李相卨) 등과 함께 동간도(東間島)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교육구국에 온몸을 바쳤다. 서전서숙의 출발은 1906년 이회영의 집에 모인 이동녕 ‧ 이상설 ‧ 여 준(呂準) 등의 합작품인데, 이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한 인재양성의 터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또, 서전서숙은 김약연(金躍淵)이 설립한 명동서숙(明東書塾), 강우규(姜宇奎)가 요하현(饒河縣)에 설립한 광동학교(光東學校), 이웃한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의 계동(啓東) ‧ 세동(世東) ‧ 신동(新東)학교와 더불어 교육구국활동의 요람이 되었다.

     이처럼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이 교육구국에 눈을 돌린 것은 무력항쟁만으로는 조국의 독립이 어렵다는 것을 간파하고,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바탕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교육을 통해서 젊은이들에게 민족정기(民族正氣)와 독립사상을 심어주려는 의도였다.

     이회영의 교육구국의 노력은 교육을 통해서 애국청년들을 양성하여 독립하는 길과 군사를 길러 일본군을 내쫓는 길의 양자를 결합한 방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회영의 이러한 조국독립의 방략의 기저에는 인간평등의 정신을 깔고 있었다. 명문호족으로서 부귀를 누리고 있었지만, 그의 머리 속에는 ‘인간은 평등하다’는 인권사상(人權思想)이 자리하고 있었다. 집안에 거느리고 있는 하인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기도 했고, 남의 집 하인들에게도 경어(敬語)를 썼다고 하니, 한말(韓末) 당시의 양반들로서는 ‘당치 않은 일’이었다(權五惇 “民族啓蒙의 길잡이-李會榮” 『韓國의 人間像』 6권 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회영은 권력 없는 사회만이 파쟁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최상의 가치로 여겼다. 이것이 그의 아나키스트(Anarchist)로서 자리잡게 했다.

     이회영은 아나키즘(Anarchism)을 일제하(日帝下)에서 조국독립의 쟁취수단으로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그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주장에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그의 동지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분열된 임시정부의 단합을 위해 조정역할을 시도했지만,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회영은 굴욕적인 삶보다 영광스러운 죽음을 선택했다. 그리고, 만주(滿洲)에 있는 동지들과 힘을 모아 투쟁할 것을 결심하고, 북경(北京)에서 상해(上海)로, 다시 만주(滿洲)로 건너가기로 했다. 1932년 11월 초순, 비장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이 때, 만주는 1931년 일본이 일으킨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 이미 일본군에 의하여 점령된 상태였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천진(天津)으로 가야 할 배가 일본군의 점령지인 대련(大連) 앞바다에 닿고 말았다. 이회영의 머리에 불길한 예감이 느껴졌다. 11월 13일, 그는 대련항에서 일본경찰에 붙들려 대련경찰서로 압송된 것이다.

     이것이 고독한 혁명가 이회영의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전(全) 생애를 조국독립의 일념으로 살았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일본경찰의 고문에 의하여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그 때가 1932년 11월 17일이었다. 두손 모아 선생의 명복(冥福)을 빈다.

권용우<명예교수‧법학>
권용우<명예교수‧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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