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천의 엔딩크레딧] 1. 엔딩크레딧
[김상천의 엔딩크레딧] 1. 엔딩크레딧
  • 김상천
  • 승인 2013.03.13 17:47
  • 호수 1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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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엔딩크레딧이다

모든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엔딩크레딧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떠세요. 영화 볼 때 엔딩크레딧 다 보고 나오시나요? 극장에서 둘러보면 사실 엔딩크레딧 끝까지 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엔딩크레딧은 영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검은 화면 흰 글씨일 뿐이니까요. 주변에서 일어나면 따라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닌가 눈치 보게 되는 탓도 있죠.


그런데 이때 미동도 없이 묵묵히 화면을 응시하는 관객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표정은 참 묘합니다. 실은 저는 가끔 그런 표정들을 훔쳐보곤 하는데요(변태는 아닙니다. 아동과 청소년은 절대 훔쳐보지 않습니다).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걸까요. 분명 머릿속으로 영화를 되감으며 장면과 메시지를 곱씹고 있겠죠. 등뼈를 타고 내려가는 오싹한 전율을 느끼며 감탄하고 심호흡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꼭 밤바다 앞에 앉아 출렁이는 파도를 보는 여행자의 표정 같기도 합니다. 영화를 아주 좋아하는 저는 때때로 그런 표정에서 뭉클함을 느끼곤 합니다.


스크린 너머 사유의 세계에서 다시 삶의 현실로 빠져나오는 마지막 터널. 엔딩크레딧은 그런 터널이 아닐까요. 검은 화면 위로 현실의 이름들이 오르는 이 순간, 영화는 비로소 삶과 이어집니다. 가상과 현실이, 허구와 실제가, 상상과 생활이 만나는 접점입니다. 이 어두운 터널 속에서 우리는 증류수처럼 사유하고 탄산수처럼 전율합니다. 삶과 영화의 대화는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얼마 전 <차이니즈 조디악12 Chinese Zodiac Heads>을 봤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성룡영화를 봤습니다. 반갑더군요. 특히 특유의 NG모음 엔딩크레딧에선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엔 NG모음과 함께 육성 메시지도 있더군요. “나 재키 찬은 내가 자랑스럽다.” “위험한 액션씬을 찍을 때마다 두렵기도 하고 많은 생각이 든다. 이게 마지막 액션씬이 되진 않을까, 내 생애 마지막 씬이 되진 않을까….” 짠하더라구요. 어렸을 땐 명절마다 성룡영화를 보며 자랐는데 말이죠. 허구를 만든 과정을 보여주며 자연스럽게 관객을 현실로 돌려보내는 성룡영화 특유의 NG모음, 볼 수 없는 시대가 되면 많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 <차이니즈 조디악> 엔딩크레딧. 성룡은 이번 영화의 엔딩크레딧을 통해 특유의 NG모음과 더불어 특별 메시지도 전했습니다. (사진=조이앤컨텐츠그룹)

엔딩크레딧은 이렇게 소통의 장이기도 합니다. <26년>은 우여곡절 많던 영화 제작에 힘을 모아준 1만5천여 명의 제작두레 사람들 이름을 모두 실어준 탓에 무려 11분 동안이나 엔딩크레딧이 이어지더군요. 영화를 찍은 장소, 카메오로 출연한 배우 등 가상세계를 구성한 현실의 요소들이 궁금하다면 찾아볼 수도 있죠. 익살맞은 농담을 던지거나 후속편을 귀띔해주는 쿠키를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들은 엔딩크레딧에서 우리 삶 속의 실제 주인공들을 소개하기도 하죠. 혹시 9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자메이카 봅슬레이팀을 다룬 영화 <쿨러닝Cool Running> 보셨나요? 엔딩크레딧에서 실제 선수들 사진이 나왔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설마 이게 실화였다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이 흑형들이 2000년 모나코에서 열린 세계봅슬레이 챔피언십에선 당당히 금메달을 땄다고 하네요. ‘자메이카 봅슬레이팀’이 말이죠. 정말이지 물개처럼 힘차게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엔딩크레딧을 가장 흥미롭게 사용한 영화 중 하나는 홍상수 감독의 <옥희의 영화>입니다. 네 개의 단편을 합친 이 영화엔 엔딩크레딧도 네 번 등장해요. 실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장편영화로 등록되기 위해선 80분이 돼야 하는데 상영시간이 모자랐던 탓이죠. 홍상수 감독은 애초 세 편의 단편을 모두 더해도 상영시간이 모자라자 짤막한 단편 하나를 후딱 만들어서 보탰습니다. 그런데도 시간이 모자란 탓에 단편 하나가 끝날 때마다 엔딩크레딧을 넣었다죠.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얄밉게도(?) 딱 80분입니다. 어쩐지 영화 만드는 사람의 고단함이 느껴지는 엔딩크레딧 사용의 예라는 느낌이네요.


그런데 홍상수영화의 팬이거나 시네필을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이 엔딩크레딧들도 눈여겨볼만합니다. 엔딩크레딧들은 뭐 이런 색이 다 있나 싶은 유치찬란한 파란색 바탕에 낙서처럼 휘갈겨 쓴(필시 감독의 필체일 것이 분명한) 손글씨로 쓰여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에 흐르는 음악만은 기세등등하고 허세 가득한 엘가의 ‘위풍당당행진곡’입니다. 엔딩크레딧도 참 홍상수스럽지 않나요?


영화와 삶. 제가 서툴게나마 쓰고자하는 이야기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코너 제목을 이렇게 지어봤습니다. 엔딩크레딧이 오르는 동안 흐르는 순도 높은 사유의 시간을 닮은 칼럼은 될 수 없겠죠. 그저 열심히 쓰겠습니다.


영화를 무진장 좋아하는 김상천(영어영문·4)
nounsverb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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