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동계해외봉사활동] 눈빛만 봐도 통하는 우리
[네팔 동계해외봉사활동] 눈빛만 봐도 통하는 우리
  • 김예은 기자
  • 승인 2013.03.19 11:56
  • 호수 13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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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2012. 12. 21 ~ 2013. 1. 5
▲ 유치부 아이들의 아침 조회 풍경.
▲ 아이들이 데칼코마니를 하고 있다.
▲ 체육시간에 미니볼링게임을 하는 아이들. ▲ 미술시간에 만든 탈을 써보는 아이들.
▲ 15박 16일을 함께 한 봉사단원 50명의 모습.

2012년 12월 21일부터 2013년 1월 5일까지 총 15박 16일에 걸쳐 네팔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왔다. 네팔 동계봉사활동은 교육봉사, 문화공연, 자기한계극복 프로그램(안나푸르나 등반) 등으로 진행됐다. 네팔에서 보낸 15일은 3년간의 대학생활에서, 아니 내 인생에서 손꼽을 정도로 좋은 경험이었다. <편집자 주>

마지막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한 번 아이들을 안고 말하고 싶다.
“머 티밀라이 마야 거르츠”
(Ma Timilai Maya Garchu)

 

아침 일찍부터 분주히 준비한 끝에 무사히 카트만두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학기말 고사가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몰라도 네팔에 가고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처음으로 나가는 해외, 그것도 해외봉사활동에 설레는 한편 가서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을 한 가득 안고 네팔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7시간 걸려 도착한 네팔 공항은 우리나라 중소도시의 버스 터미널 같았다. 포근한 날씨에 반팔티셔츠를 입고 있는 공항 직원의 모습을 보니 네팔에 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옷을 두툼하게 입은 나는 패딩 점퍼를 벗었다. 갑자기 두꺼운 패딩 점퍼가 한국에서의 나의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는 패딩 점퍼를 벗은 것처럼 한국에서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잠시 접어둬야겠다고 다짐하며 공항을 나섰다.

다음날, 본격적인 봉사활동에 앞서 우리가 앞으로 봉사를 펼칠 트리부반 아다르샤 스쿨을 둘러 봤다. 트리부반 아다르샤 스쿨은 네팔의 파핑 지역에 위치해 있는 학교로,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에서 버스로 1시간정도 걸렸다. 학교로 향하는 길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열악했다. 우리네 시골 길을 연상시키는 비포장도로 위에서 버스는 쉴 틈 없이 덜컹거렸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갈 때는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 나무를 볼 수 있었다. 먼지가 가득 쌓인 나무 옆을 지날 때마다 완전히 닫히지 않는 창문 틈새로 먼지가 스며들어 금세 코가 매워졌다. 운전기사는 도무지 틈이 없어 보이는 좁은 도로에서 옆 차선의 자동차와 아슬아슬 스쳐지나가는 진기를 선보였다. 차가 조금이라도 막힐 때마다 버스 엔진을 꺼버리는 그의 대담함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학교에 처음 발을 디디는 순간, 그곳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우리 봉사단을 위해 교장선생님과 선생님들, 그리고 수많은 학생들이 줄 맞춰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우리만큼이나 들뜬 표정이었다. 우리는 교장선생님이 “환영한다”는 말과 함께 건네준 흰색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얼굴엔 티카(힌두교들이 이마에 칠하는 붉은색 점)를 찍은 채 교실로 걸어갔다. 아이들의 환영인사도 뜨거웠다. 유치부부터 나이별로 길게 늘어 선 아이들은 우리를 향해 “하이”하고 힘차게 인사했다. 기대에 부응하고자 손을 모으고 “나마스떼”하고 수줍게 인사하면 여기저기서 “하이” 폭탄이 떨어졌다.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아이들의 호기심서린 눈빛이 어찌나 뜨겁던지 런웨이에 선 모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뺨이 이마의 티카처럼 붉어졌다.

본격적인 교육봉사가 시작되는 날, 의욕과 자신감이 넘쳤던 우리 팀은 첫 날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어 과목을 맡은 나는 첫 수업으로 ‘한글 자음, 모음 익히기’를 준비했는데, 예상보다 유치부B반 아이들이 너무 작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어가 1교시라 다른 대안도 없었다. 결국, 기대했던 첫 수업은 아이들이 한명씩 앞으로 나와 자기소개를 하면 우리 대학 측에서 준비한 이름표를 달아주고, 학용품 세트를 주는 시간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나마 아이들이 자기소개를 위해 알려줬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를 발음까지 완벽하게 잘 따라해 줘 쓰린 속을 달랠 수 있었다.

체육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워 운동장으로 인도하는 것부터 일이었다. 한 명씩 축구공을 차서 인간 골대에 넣는 연습을 한 후에, 두 팀으로 나눠 축구 시합을 진행하려던 우리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공을 던져주면 떼로 공으로 달려가고, 서로 밀치고 잡아당기며 아이들 사이에서 공 쟁탈전이 일어났다. 공을 하나 더 주면 양쪽에서 계속 싸움이 일어나는 등 통제가 불가능했다. 결국엔 프렘 이라는 아이가 넘어져 바닥에 이마를 심하게 쓸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프렘을 걱정하기는커녕 공을 주우러 버스 밑으로 들어가려고 열심이었다.

항상 큰일은 가장 나중에 일어난다고 진정한 사건은 마지막 시간에 터졌다. 5교시 과학시간의 주제는 ‘비눗방울 만들기’였다. 과학 담당 팀원이 가장 열심히 준비한 수업이었기에 우리는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한창 비눗방울을 만들던 중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이 집에 가야 하니 수업을 끝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선생님이 시간을 착각했거나, 현지인 고등학생 친구가 해주는 통역이 잘못된 줄 알았다. 초등부와 달리 유치부는 수업이 조금 빨리 끝난다는 사실을 사전에 못 들었기에 정말 당황했다. “첫 수업에 아이들의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며 야심차게 준비한 가장 하이라이트인 수업이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교육봉사 첫 날의 쓰라린 실패는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줬고, 모든 봉사단원들이 밤새 회의를 거듭했다. 우리 팀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작성한 계획서를 다시 보니, 네팔의 상황이나 아이들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쓴 것이라 고칠 점이 눈에 띠였다. 아이들과 수업을 진행했을 때 어떤 부분이 부족했는지, 어떤 점이 반응이 좋았는지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모든 팀원이 각자 의견을 제시해가며 교육봉사의 방향을 다시 잡았다. 하루 동안 어떤 점을 느꼈는지, 한 사람이 수업을 진행할 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도와줄지 등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첫 날의 경험은 한국에서 사전정보를 많이 못 찾아왔다는 점을 반성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전체적으로 다시 한 번 살펴보게 했다는 점에서 훌륭한 밑거름이 됐다.

첫 날의 일들을 교훈삼아 둘째 날부터는 수업을 안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나는 나만의 방법을 찾았다. 한국어의 경우 말로 설명할 것이 많아 통역의존도가 높지만, 수업의 흐름도 끊기고, 아이들도 집중을 못 했다. 그래서 통역하는 친구에게 부탁해 쉬는 시간에 미리 칠판에 ‘한국어-한국어영어발음-네팔어’ 단어를 적었다. 칠판의 단어와 평소에 통역 친구에게 배운 간단한 네팔어를 이용해 수업을 진행했더니 확실히 통역을 거칠 때보다 훨씬 집중도가 높아지는 효과를 얻었다.

봉사활동 내내 동요 ‘곰 세 마리’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우선, 아이들이 둘째 날 한국어 시간에 곰 세 마리를 배우고 180도 변했다. 전 날까지만 해도 쉬는 시간이 되면 쏜살같이 운동장으로 사라져버리는 아이들을 쫓아갔지만, 둘째 날 한국어 시간이 끝나자마자는 아이들이 먼저 같이 나가자고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 한 번에 거의 열 번은 곰 세 마리를 율동을 곁들려 불렀던 것 같다. 처음 우리 반에 세 명뿐인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시작한 ‘곰 세 마리 사랑’은 어느새 반 전체로 퍼져 한국어 시간은 물론이고, 다른 팀원들이 과학시간에 준비물 준비하느라 바쁠 때, 체육이나 레크레이션 수업 때 집중이 안 될 때, 집에 갈 때 등 거의 매 수업시간마다 큰 도움이 됐다.

교육봉사 이틀째부터 아침에 교실에 들어가면 여자 아이들이 무언가를 손에 쥐어주고는 후다닥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집, 나무, 여자아이 등을 그린 종이였다. 꼬깃꼬깃한 종이에 삐뚤빼뚤하게 그린 그림이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선물이었다. 하루는 아이들과 놀다가 점심을 먹으러 가려는데, 아유사라는 여자아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한참을 걸어가더니 아이들이 없는 곳에 다다라서 교복 치마 속에서 꺼낸 작은 비스킷 하나를 손에 쥐어줬다. 그리고는 씩 웃었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했더라도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 순간 아유사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는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마지막날, “내일 보자”며 내손을 잡고 힘차게 흔들던 아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훤하다. 되돌아보면 영어를 못하는 아이들과 네팔어를 모르는 내가 어떻게 그렇게 잘 지낼 수 있었을까 신기할 따름이다. 눈이 마주쳤을 때 씩 한 번 웃는 것, 아이가 울 때 토닥여주는 것, 안아주는 것,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 손잡는 것…. 말은 안 통했어도 진심은 통했다. 

김예은 기자 eskyen@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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