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천의 엔딩크레딧] 2.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그리고 홍상수영화
[김상천의 엔딩크레딧] 2.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그리고 홍상수영화
  • 김상천
  • 승인 2013.03.20 21:42
  • 호수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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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사이로 보는 어른들의 뽀로로


소설가 최민석은 누가 언제 홍상수영화를 한 문장으로 정의한 것을 들었는데, 그 문장은 이랬다고 합니다.


“지방에 가서 한다.”


깜짝이야. 아니 이게 뭔가요. 이렇게 죽이는 표현을 하다니. 놀러가서 붕가붕가 하는 게 전부인 원색적인 영화는 물론 아니죠. 그러나 홍상수영화의 연출무대는 언제나 여행지-술집-침대 동선입니다. 간소한 미니멀리즘의 무대. 인간의 속내를 들쑤시는 이야기들은 이렇게 배경이 간결해야 좋습니다. 그래야 내면 깊이 감춰진 심리를 노골적으로 비추는데 집중할 수 있거든요. 작은 시골마을(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Dogville>)이나 빈집(김기덕) 정도면 무대로써 충분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 홍상수영화를 “지방에 가서 한다”는 문장으로 압축할 수가 없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북촌방향>에 이어 이번에도 서울(서촌)이 배경입니다. 아니 그보다,


이번 영화에선 안 합니다.


와, 안 하는 홍상수영화라니…. 지금이라도 관객들이 실망하는 걸 막기 위해 제목을 ‘누구와도 하지 않는 해원’으로 바꿔야 하는 건 아닐까요? 농담입니다. 흐흐흐.

▲ 해원과 제인 버킨(샬롯 갱스부르의 모친)이 꿈속에서 만나는 장면. 정은채는 실제로도 샬롯 갱스부르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다죠.

<…해원>에선 담배라는 메타포가 베드신을 대신합니다. 담배는 여러 영화에서 성욕과 섹스를 상징하는 소품으로 이용돼왔죠. 캐서린(샤론 스톤)이 노팬티 미니스커트로 다리를 꼬고서 담배를 피운 <원초적본능Basic Instinct>의 취조실씬처럼요. 막대 모양인 담배를 깊이 빨고서 연기를 내뱉는 샤론 스톤의 모습은 남성관객들이 침을 꼴깍 삼키게 만들었죠.


<…해원>에서 해원(정은채)에게 껄떡대는 남자들은 모두 담배를 피웁니다. 동주(류덕환)는 야릇한 눈빛으로 해원을 보면서 연신 담배를 피워대죠. 동주가 피우던 그 담배는 성준(이선균)이 밟아서 불씨를 꺼버립니다. 성준과 다투고 헤어진 뒤 다른 남자(중원-김의성)와 잘될 것 같자 해원은 성준이 밟고 간 담배를 밟아서 분질러버리죠. 그렇게 보니 남한산성 꼭대기(=담배를 못 피우는 상황)에서 “아, 담배 피우고 싶다”고 외치던 성준의 대사도 의미심장하게 들리네요.


주변엔 어떻게 한번 자보려고 껄덕대는 남자들밖에 없고 자기정체성도 흐릿한 해원은 쓸쓸해보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씬의 ‘그래도 막걸리 준 아저씨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는 대사는 곱씹을수록 슬프군요.


내레이션 오버랩이나 끈적하고 정치적인 대사, 드러나는 속물근성 등 홍상수영화의 반가운 특징들은 여전합니다. 그중 성준과 제자들의 술자리씬은 두고두고 생각해도 웃기네요. 영화과 학생들은 성준에게 묻습니다. “감독님은 교수 왜 하세요? 영화에서는 교수들 그렇게(찌질한 속물로) 그리시면서….” 성준은 답합니다. “좋잖아, 돈도 벌고 연구실도 쓰고.” 뱉고 나니 분위기가 싸해지자 “난 너희같이 젊은 친구들 만나는 게 너무 소중하다”며 얼버무립니다. 저는 이 영화를 건국대 앞에서 봤는데요. 영화 끝나고 화장실에서 우연히 듣게 됐는데, 영화 속 학생들은 실제 홍 감독님 제자들이라고 하네요. 그러니까 실제 자기 학생들한테 저렇게 얘기한 셈이죠. 진짜 뻔뻔하지 않습니까?


아, 이래서 홍상수영화가 좋아요. 황당할 정도로 솔직하게 드러내는 인간의 이중성. 민망하고 쪽팔려서 난 다르다고 믿고 싶어도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속물근성. 그런 걸 보여주면서도 질타한다거나 교훈·위로·감동 같은 걸 강요하지 않죠. 그냥 보여줘요. 우리는 그냥 이렇게 생겨먹었다. 대단한 존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면서 그걸 싸늘하게 비웃는 게 아니라 결국 따뜻한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하죠.


사실은 우린 다 엉망진창이에요. 안 그렇습니까?


영화를 무진장 좋아하는 김상천(영어영문·4)
nounsverbs@naver.com

 

* 최민석 작가의 책 제목은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공감의 기쁨, 2012)입니다. 머리식힐 때 읽기 딱 좋은 B급 코믹 에세이들을 엮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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