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대학 상징탑과 추모비
우리대학 상징탑과 추모비
  • 김윤숙·이호연 기자
  • 승인 2013.03.26 12:22
  • 호수 13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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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전 상징탑.

 

-금주의 의뢰인 오은지(국어국문·2)씨 : 죽전캠퍼스에는 곰상과 설립자인 범정 장형선생과 혜당 조희재여사의 동상이 있습니다. 또 독특하게 정문입구에는 정승이 지키고 서있어요. 이외에도 우리 대학에는 어떤 조형물들이 있는지, 왜 만들어진 것인지 알려주세요!

 

 죽전캠퍼스 정문에 바로 보이는 상징탑과 정문 조형물은 2007년 죽전캠퍼스로 이전하며 새로 만든 것이다. 상징탑과 정문 조형물은 공모에 당선된 노재승 씨가 설계했고 ‘화합, 융화, 소통’을 주제로 만들어 졌다. 우리 대학의 전통 마크와 우주의 합일을 뜻하는 ‘천, 지, 인’의 세 가지 형태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상징탑은 ‘공존의 장’, 정문 조형물은 ‘화합의 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설팀 이진국 팀장은 “정문 조형물은 전통마크를 기본요소로 삼고, 현대적인 조형미와 더불어 심벌마크를 도입해 미래로 향하는 단국의 힘찬 기상과 희망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죽전캠퍼스 조형물 중 가장 눈길을 뜨는 것은 죽전캠퍼스 정문진입로 오른편에 위치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다. 본래 장승은 마을의 잡귀와 질병을 물리치는 일종의 수호신 역할을 하기 위해 마을 어귀에 세워놓는다. 한남동 캠퍼스 시절 당시 총학생회가 두 장승을 제작했으며, 한남동 캠퍼스 본관 분수대 옆에 있던 것을 2007년 죽전캠퍼스로 이전하며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장승 외에도 우리 대학은 곰상(평화의 광장), 신동엽 시비(인문관 입구), 홍난파 흉상(음악관 중정), 여인상(체육관 입구), 4.19 기념비(혜당관 우측), 사자상(박물관 입구), 퇴계이황선생 좌상(도서관 3층)을 함께 옮겨왔다.

마지막으로 죽전캠퍼스에서 살펴볼 조형물은 퇴계도서관 전면에 있는 도자 조형물이다. 이 조형물의 정식 명칭은 ‘생명-뿌리Ⅱ’로, 진리와 봉사를 교시로 하는 우리 대학이 무한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세계로 뻗어 나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008년 도예과 김혁수 교수가 제작했고, 김상운 회장이 기증했다.

 천안캠퍼스에는 곰상과 설립자 범정 장형선생과 혜당 조희재여사의 동상을 제외하고 두드러지는 조형물은 없으나 죽전캠퍼스와 달리 세 개의 추모비가 있다. 최덕수 열사·정재훈 중위·서정훈 하사의 추모비가 그것이다. 

 천안캠퍼스에서 가장 오래된 추모비는 최덕수 열사의 추모비다. 최덕수 열사는 1987년 우리 대학 법학과에 입학, 1988년 5월 18일 교내 시계탑 앞에서 분신하여 8일 만에 숨졌다. 최 열사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민주해방열사 중 한명으로 천안캠퍼스 내에서 광주영령 추도식이 행해지는 도중 “광주항쟁진상규명”과 “국정조사권발동”을 외치며 분신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뒤를 잇는 추모비는 시계탑 공원에 위치해 있는 정재훈 중위의 추모비이다. 정재훈 중위는 1989년에 우리 대학을 졸업했으며 학군단 27기에 임관했다. 정 중위는 1990년 3월 10일 강원도 고성군에서 연대 전투단훈련에 참가, 도하 작전 중 익사위기에 처한 소대원 2명을 구하고 순직했다. 학군단장 원종설 중령은 “매년 정재훈 중위의 사망일인 3월 10일에  학군단원들이 모여 조촐하게나마 추모식을 거행한다”고 말했다.

 마지막 추모비는 천안캠퍼스 사회과학관 앞에 위치한 서정훈 하사의 추모비다. 서정훈 하사는 2008년 우리 대학 법학과에 입학, 2009년 해병대 1088기에 자원입대했다. 해병대 연평부대에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던 중 2010년 11월 23일 북한의 포격 도발에 의해 전사했다.

 추모비 외에 천안캠퍼스의 조형물로는 사회과학관 안의 뽀뽀를 하는 연인상, 통칭 ‘뽀뽀상’이 있다. ‘뽀뽀상’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으나 1980년 7월 조각가 김정숙 씨에 의해 만들어졌다. 총무구매팀 박상문 처장은 “내가 학교에 다닐 시절에도 ‘뽀뽀상’은 있었다. 왜 그런 상을 만들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처음 사회과학관을 만들었을 때는 그곳에 산업디자인학과가 함께 있었다”며 “지금처럼 예술대학이 따로 없었는데 산업디자인학과가 있다는 특징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고 설명했다.
 
김윤숙·이호연 기자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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