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 홍영후의 빛과 그림자
난파 홍영후의 빛과 그림자
  • 신현식 기자
  • 승인 2013.03.26 13:59
  • 호수 13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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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적과 친일 객관적으로 평가 해야

‘음악관에 개관한 난파 홍영후 전시실...반대합니다.’
지난 14일 우리 대학 재학생 자치 커뮤니티 단쿠키에 난파 홍영후 전시실 개최를 반대하는 글이 올라왔다. 이 글은 학생들 사이에서 반향을 일으키며, 친일 행위를 했다고 알려진 난파의 전시실을 왜 민족사학인 우리 대학에서 개관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불거졌다.
지난 13일 열린 난파 홍영후 전시실에는 등록문화재인 동판동요악보 원판 51개 등 난파 선생의 유품 420여점이 전시돼있다. 한국 근대 음악의 개척자로 알려진 난파 홍영후는 ‘퐁당 퐁당’, ‘고향의 봄’, ‘봉선화’ 등을 작곡하고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했다. 홍영후는 일제 치하의 아픔을 담은 음악가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으로 ‘봉선화’는 일제치하에 있던 조국을 ‘담 밑에 저만치 외롭게 피어 있는 꽃’으로 비유해 비운의 아픔을 표현한 곡이다. 하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그가 친일 행위을 했다는 논란이 있다. 대표적인 친일 행적에는 창씨개명, 양악 작곡가, 조선음악협회 평의원,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친일·전쟁협력 ‘애국가요’의 작곡과 평론,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 발표가 있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을 통해 홍난파의 친일 행적에 대한 재고의 근거가 증명되고 있다. 경기도음악협회 난파연구위원을 재임 중이며 난파 홍영후 전시실 자문위원을 맡은 신도성씨가「음악저널」에 연재한 <홍난파의 음악과 삶에 대한 쟁점>을 보면, 난파가 모리가와 준(森川潤)이란 이름으로 창씨 개명한 것이 확실한 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홍난파는 매일신보 1940년 9월 1일자에 ‘조선영화와 음악’이라는 평론을 森川潤 으로 발표한 일이 있다. 그러나 이 글 외에 森川潤 (모리카와 쥰)이름을 사용하여 작품이나 평론을 발표하거나 사용한 기록을 그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단 한번 신문에 森川潤(모리카와 쥰)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한 것만으로 홍영후가 창씨 개명을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홍난파는 매일신보 1940년 11월 6일자에 ‘기타의 음악적 지휘: 정세원군의 기타라 독주회를 압두고’를 발표할 때도 홍난파의 이름으로 발표한 바 있다. 그의 창씨명이 森川潤(모리카와 쥰)인지도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홍난파가 ‘조선음악협회 평의원이고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을 역임했다는 사실 또한 쟁점이다. 1931년에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를 역임하며, 그때부터 신문에서 ‘조선음악계의 원로’로 불렸다. 그의 명성과 음악활동으로 보아 조선음악협회의 평의원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거기다 홍난파를 포함한 조선음악협회 결성식에 있는 우리나라 음악인의 명단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는지, 아니면 조선총독부의 강요에 의해서 이름이 들어갔는지는 단정 짓기 힘들다. 또한 이와 관련된 어떠한 친일 행위도 찾을 수 없다.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것에 대해서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그는 논문을 제출하기 전까지 일본 경찰로부터 감시를 받는 요시찰 인물로 활동의 제한을 받고 있었다.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은 당시 수감되었던 대부분의 수양동우회 회원들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쓸 수밖에 없는 글이었다. 사상전향서를 쓰기 1년 전 「조광」에서 “나를 낳고 나를 길러준 내 땅이야말로 내가 살지 않으면 아니 될 고장입니다. 나는 여기에 살 의무가 있고 나는 내 땅에 살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국외에 나가서 살 생각은 꿈에도 없습니다”고 발표했다. 홍난파 자신이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본인 스스로 작성한 것인지 강요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한 정보가 없다.
홍난파를 15년째 연구 중인 신도성씨는 “홍난파는 미국에서 음악가로서의 자유로웠을 삶을 접어두고 조국의 음악을 발전시키고 후학양성을 위해 식민지 조국으로 돌아왔다. 홍난파에 대해서는 ‘선 연구 후 평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 한다”고 말했다. 또 신도성씨는 “「친일 문학론」을 쓰신 임종국 선생이 하신 말씀이 있다. "역사란 거울에 자신을 비쳐보는 것이다.” 자신이 자랑하고 싶은 부분도 있지만, 감추고 싶은 부분도 있다. 이번 단국대학교 난파 홍영후 전시관은 그런 부분에 있어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한편 난파 홍영후 전시실 내부에는 그의 친일 행위에 대한 언급이 없어 학교 측이 그의 친일 행위를 감추려는 것이 아닌지 의혹이 제기되고있다. 단쿠키에 글을 올린 이태준(피아노·4)씨는 “난파 홍영후 전시실을 방문 했지만 그의 친일 행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힘들었다”고 비판했다.
전시실의 자문을 맡은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이용창씨는 “난파 홍영후는 그 때 당시 사회적인 지도자로서 어찌됐든 친일 행위에 대해 평가받아야 한다. 학생들이 그의 친일 행위에 대해 정당성을 판단하는 것은 학생 자신의 판단이다. 이러한 면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측에서 봤을 때 전시실은 그의 치적과 친일 행적을 알 수 있도록 충실하고 객관적으로 만들어 놨다”고 말했다.
신현식 기자 shsnice1000@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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