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천의 엔딩크레딧] 4. 좀비영화를 얕보지 마라 2/2
[김상천의 엔딩크레딧] 4. 좀비영화를 얕보지 마라 2/2
  • 김상천
  • 승인 2013.04.03 21:26
  • 호수 13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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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후>와 <나는 전설이다>의 Hello

방금까지 아무렇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광분합니다. 분노에 찬 눈에선 피가 흘러내립니다.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며 주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습니다. 계통도, 심지어 취향도 없습니다. 희생자들은 하필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목이 뜯긴 채 자기 피를 뒤집어쓰고 비명을 지릅니다.


<28일후28Days Later>의 한 장면입니다. ‘뛰어다닌다’는 사실이 소름끼치지 않나요? 달리기를 잘하는 감독답게 대니 보일은 흐느적거리던 좀비들을 달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그전까지의 좀비영화들과는 비교가 안 되게 영화가 팽팽해졌죠. 난데없이 나타나는 악령이던 좀비의 정체성도 분노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변이로 다시 썼습니다. 서사가 설득력을 갖추니까 더 몰입되고, 더 무섭습니다. 좀비영화의 역사는 대니 보일 이전과 이후로 나뉜대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평범해보이던 옆 사람이 난데없이 광분합니다. 분노에 찬 눈으로 안주머니에서 공업용 커터칼을 꺼내 주위 사람들에게 휘두릅니다. 지하철에서, 광장에서, 하필이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칼에 찔립니다.

 
이번엔 영화가 아니라 몇 달 전 여의도에서 벌어진 우리의 현실입니다. 평범한 이웃이 돌변해서 공격한다는 설정. 좀비물이 요즘 시대 이목을 사로잡는 밑바탕엔 현대사회의 잠재적 불안이 있는 건 아닐까요. 혹시 밤길에 누가 뒤에서 걸어오면 괜히 무섭지 않나요? 지하철 기다리다 누가 뒤에서 밀 것 같은 느낌에 흠칫한 적은요? 세계 도처의 공공장소 무차별테러 뉴스는 현대인의 마음속에 불안감을 심습니다. 눈앞에 재현되면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죠. 어딘지 음산하고 불안해보이는 남자가 야구방망이를 꽉 쥐고 아이들 쪽으로 걸어가는 <크레이지Crazes>의 도입부 장면처럼요.


좀비영화엔 현대인의 눈을 사로잡는 요소가 많습니다. 꼭 나오는 텅 빈 대형마트 씬도 그렇죠. 값을 치르지 않고도 마음껏 물건을 챙길 수 있는 마트는 자본주의 붕괴의 상징과 다름없습니다. 현실에서 구매 행위를 할 때 억눌려온 욕구와 상대적 박탈감이 해소되며 통쾌함을 느끼게 되는 장면이죠.


텅 빈 빌딩숲은 또 어떤가요. 자동차가 줄지어 멈춘 적막한 도로는요. 체제가 붕괴되고, 시스템이 마비된 세상의 정적은 한편으로는 상당한 해방감을 줍니다. ‘live’라는 단어엔 흔히 부사들의 수식이 따르지만 ‘survive’엔 그럴 필요가 없죠. 이제부터 삶이 오직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의 문제로 단순해졌다니 얼마나 개운해요. 소설가 박민규가 <씨네21>에 쓴 칼럼처럼, 자본주의의 죽느냐 사느냐(to buy or not to be)는 ‘더럽게’ 복잡한 문제잖아요.

 

▲ <나는 전설이다>의 로버트 네빌과 강아지 샘. 공포와 외로움에 떨며 다시 해가 뜨길 기다립니다.

 
에이, 근데 그게 또 아닌가봅니다. 문제는 물질이 아니었네요. <나는 전설이다I Am Legend>를 보니 그렇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생존 인류일지도 모르는 로버트 네빌(윌 스미스)은 처참하게 외로워합니다. 제발 누가 대답 좀 해주길 바라면서 끊임없이 ‘Hello’를 외치며 텅 빈 세상을 헤맵니다. 마네킹에 말을 걸기도 하죠. 기르던 개마저 죽자 그는 스스로 더 살기를 포기하고 맙니다.

 
<28일후>의 결말에서 카메라는 언덕에 커다랗게 쓰인 ‘HELL’이라는 글자를 슬쩍 비춥니다. 우여곡절 끝에 생존한 주인공들이 천을 엮어 만들어놓은 단어죠. 그렇게 관객을 긴장시켜놓고선 불완전하게나마 가족의 형태를 갖춘 주인공들이 서로를 향해 웃는 얼굴을 클로즈업 합니다. 사실은 ‘HELL’ 뒤에 붙어있었던 ‘O’위에서 웃고 있네요.

인간은 어찌됐든 타인의 체온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인가봅니다.

영화를 무진장 좋아하는 김상천(영어영문·4)
nounsverb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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