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천의 엔딩크레딧] 7. 김기덕, 윌리엄 포크너, 그리고 자크 라깡
[김상천의 엔딩크레딧] 7. 김기덕, 윌리엄 포크너, 그리고 자크 라깡
  • 김상천
  • 승인 2013.05.08 14:55
  • 호수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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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라는 비극 속에선 누구도 가해자일 수 없다

 

책을 읽거나 펴내는 사람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하나 있었죠. 윌리엄 포크너와 헤르만 헤세의 사후 50년이 지남에 따라 올해 두 작가의 저작권이 말소됐다고 하네요. 지금까진 이들의 계약권을 가진 국내 출판사가 민음사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대문호의 여러 명저 중에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수록된 헤세의 『데미안Damien』이나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As I Lay Dying』 정도밖에 없었죠.


김기덕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포크너를 꼭 권하고 싶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 명입니다. 만약 ‘미국문학 어벤져스’ 같은 게 있다면 카메라 잘 받는 중간 어디쯤 설만한 작가죠. 미국의 셰익스피어라 불릴 정도로 표현력이 굉장합니다. 특히 ‘언어’에 대한 사유의 깊이는 압도적이죠. 포크너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써서 등장인물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무의식의 언어를 이텔릭체로 서술합니다. 그러면서 무의식이 인물의 행위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곤 하죠. 여러 출판사에서 경쟁하듯 펴내고 있으니 읽어보시길 권해봅니다.


포크너와 김기덕, 두 사람의 작품세계엔 접점이 있습니다. 주제, 말하고자 하는 바, 표현하는 방식까지 아주 닮았어요. 살인, 자살, 강간, 근친상간 등 사회적으로 금기시하는 것들은 두 사람 작품의 단골 소재죠. 그 안에서 끔찍한 폭력과 잔혹한 복수, 개인의 광기와 집단의 히스테리가 비춰집니다. 끝내는 선과 악, 삶과 죽음, 운명과 욕망 같은 대립적 요소들이 한데 뒤엉키고 맙니다. 그 뒤엉킴 자체로 관객에겐 이미 폭력이나 마찬가진데, 그걸 꼭 고개를 돌리지 않고는 못 배기게끔 잔혹하게 묘사하는 탓에 대중은 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죠.


그럼 평단은 왜 이들을 높이 평가할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 한 가지는 아마 결국엔 그 불편함 속에서 세상에 대한 연민을 발견하기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두 사람 작품엔 결국 가해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피에타Pieta>에도 『8월의 빛Light in August』에도 뒤틀린 세상이 만들어낸 뒤틀어진 피조물들이 사슬처럼 얽혀있을 뿐이죠. 그래서 작품을 보고나면 우선 마음이 무거워지고, 또 왠지 화가 나고, 곧 슬퍼집니다. 어쩐지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죠. 그러다 일상으로 돌아온 어느 순간엔 사람에게 약간은 너그러워진 자신을 발견하고 조금 놀라기도 합니다.




세상이라는 비극 속에선 누구도 가해자일 수 없다. 이들은 결국 이 말이 하고 싶은 게 아닐까요. 이들 작품에서 가해자는 언제나 가해자인 동시에 희생양입니다. 이 뒤틀린 인물들은 자크 라깡의 정신분석학을 거칠 때 가장 잘 이해됩니다. 라깡은 주체가 사회로 진입할 수 있게 인도하는 존재, ‘대타자’를 모방함으로써 한 인간의 인격이 형성된다고 분석했습니다. 아이가 부모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처럼요. 만약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 뒤틀린 대타자를 만나면 주체도 뒤틀린 욕망을 품게 됩니다. 즉 히스테리 환자, 혹은 사이코패스처럼 뒤틀리고 분열된 주체는 결국 또 다른 피해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폭력을 모방하고, 뒤틀림에 신음하고, 그러다 분열과 부정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세상에 저항하는 비극이 벌어지고 마는 것이죠.

 
여중생을 성폭행·살해하고 시체를 끔찍하게 유기한 김길태의 이름은 아시다시피 ‘길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사회는 김길태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성장 과정에서 가족 학대와 사회적 냉대를 받아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졌다”며 “사회적 책임을 개인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고 판결했죠. 동의할 수도,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는 판결인 것 같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증오는 스스로에게도 괴로운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증오는 터무니없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계속 생각나서 견딜 수없이 피를 말리게 하죠. 증오는 갑자기 사라지지 않습니다. 증오는 아주 조금씩 침식됩니다. 모든 큰 감정들은 긴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너무 큰 상실은 그게 어떤 의미인지 깨닫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용서도 다시 떠올리고 곱씹고 삭히면서 아주 조금씩 이뤄지는 감정입니다.


사람들은 결국 증오를 포기하고 용서를 택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도무지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것을 축복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영화를 무진장 좋아하는 김상천(영어영문·4)
nounsverb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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