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4일 새롭게 태어난 숭례문
5월 4일 새롭게 태어난 숭례문
  • 신현식 기자
  • 승인 2013.05.10 15:39
  • 호수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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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제외하고 일반인에 매일 공개

2008년, 숭례문 화재
그 후
1천 9백 11일 간의
 노력 끝에
민족의 긍지로
다시 태어나다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은 한 노인의 방화로 인해, 2008년 2월 10일 일요일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은 허무하게 불타버렸다. 부실한 관리체계, 진화 과정에서의 미흡함으로 숭례문은 너무나 쉽고 빠르게 재로 변했다. 5년 3개월여 간의 기나긴 복구 작업이 끝나고 2013년 5월 4일 토요일, 숭례문은 서울 도심 한가운데서 새롭게 그 웅장함을 뽐냈다. 
 <편집자 주>

5월 4일 새롭게 태어난 숭례문

월요일
제외하고 일반인에
매일 공개

 

 

5월 4일 숭례문 복구 기념식이 열렸다. 숭례문은 대한민국 국보 1호다. 1396년에 한양 도성의 남쪽 문이자 정문의 역할을 했던 숭례문은 대한민국의 ‘얼’이다. 임진왜란 때도 온전하게 보전되어 왔던 숭례문은 5년 전 설날 마지막 연휴의 저녁에 화염 에 휩싸였고, 많은 부분이 소실됐다. 숭례문은 ‘복원’이 아닌 ‘복구’라고 규정했다. 국민 대다수가 화재 당시 숭례문이 모두 타 버렸다고 알고 있지만 소실되었던 부분은 일부였기 때문에 훼손된 부분을 바로잡는 ‘복구’라고 한 것이다. 현대의 기계작업을 버리고 전통방식을 통해 화재 전 숭례문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구했다.
성곽공사와 문루복구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복원 범위를 늘려 국보 1호의 위용을 과시하고 후세에게 자랑스러움을 남기려고 했으나, 남대문시장으로 연결된 지하보도가 구조적으로 취약하여 더 이상으로 복원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복구비용 270억여 원, 6명의 장인을 포함해 연인원 총 3만 5천여 명이 복구에 매달렸다. 소나무를 기증한 국민이 있는가 하면 국내외에서 7억 원이 넘는 국민 성금이 모였다. 우리나라는 애국의 나라임에 틀림없다.
석재의 수급, 문루의 목재, 전통방식을 따른 기와 제작 방법 등 복구 과정의 많은 내용들을 습득하고 갔지만 막상 현장에 보이는 것은 그냥 그 자체의 숭례문이었다. 역사적인 숭례문 복구 기념 현장에서 복구 과정의 세세함을 알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의 기쁨을 느끼는 것, 숭례문의 재탄생을 축하하는 것, 그 자체가 중요했다.  
5월 4일 오후 날씨는 맑고 쾌청했다. 거기에다 한적한 바람까지 불었다. 하늘도 복구 기념식을 환영하는 듯했다. 아침 여덟시부터 서울역에서 회현역 사이에 숭례문 복구 기념식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시장사람들로 붐볐다. 20년 동안 남대문 시장에서 카메라 장사를 해왔다는 박성자(52)씨는 “그저께부터 숭례문 복구기념 남대문 관광특구 대축제가 열려 많은 사람들이 왔다”며 “숭례문 복구 기념식이 있는 오늘은 외국인 관광객까지 더해지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올 것이다”고 말하며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열시쯤 취재진들이 삼삼오오 몰려 왔다. 주요 방송 3사는 물론이고 사진기자들은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한 자리 경쟁이 치열했다. 필자도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MBC, SBS, KBS 방송기자들을 따라 다녔으나, 소형카메라 하나 들고 이리저리 다니는 모습을 보고 텃세를 주는 바람에 쓸쓸이 자리를 옮겨야 했다. 가족단위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기는 물론, 돗자리와 도시락까지 싸왔다. 4인 가족의 가장인 김학주(50)씨는 “어린이날을 맞이해 아이들과 여행을 갈까 했지만 숭례문 복구 기념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여행 계획을 취소했다”며 “숭례문은 우리나라의 보물 1호로써,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 아침부터 김밥도 쌌다.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열두시부터 도로는 물론이고 잔디밭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예상보다 많은 인파가 모인 탓에 경찰들은 일산분란하게 움직였다.
1911일 간의 노력을 기념하는 숭례문 복구 기념식을 눈앞에서 볼 수 없었다. 수많은 인파들이 숭례문 복구 기념식에 참여하기에는 숭례문은 실제로 그렇게 크지 않았다. 멀리서나마 대형 TV로 보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 모습은 볼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이날 “문화재 복구 차원을 넘어, 우리 민족 긍지를 되살리고 새로운 희망, 시대 문이 열린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박 대통령의 연설을 최대한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숭례문에 최대한 가까이 모여들었다. 2시부터 4시까지 숭례문에서 광화문까지의 행진 퍼레이드도 즐거움을 더했다. 사물놀이 패의 흥겨운 소리와 퍼레이드에 참가한 여성들은 한 무리의 꽃과 같았다. 그렇게 복구 기념식은 성황리에 진행됐다.
숭례문의 재탄생의 하루, 국보 1호의 위용을 다시 찾는 날. 2013년 5월 4일은 기쁘고 아름다운 것만 보일 줄 알았다. 자동차가 지나가는 와중에도 무단횡단은 당연한 행동이었다. 경찰들의 교통관리는 무용지물이었다. 4시부터 시작된 숭례문 입장은 ‘전쟁터’이거나 ‘노사갈등이 첨예한 데모 현장’과 비슷했다. 이 날 눈으로 본 싸움만 2번이고, 뒤에서 밀어서 넘어진 노인과 어린이들을 열 번은 넘게 봤다. 2시부터 숭례문 입구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은 네줄로 늘어섰다. 늘어선 길이가 200m에 다다를 정도로 길었다. 경찰들은 사람들이 중간 중간에 새치기를 하고 뒤에서 미는 사람들이 생겨 다툼이 생기기 시작해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 시작했다. 경찰들이 시민들을 에워싸는 ‘경찰 바리케이트’를 만들었고, 4시가 가기 전에 네줄을 두줄로 바꾸면서 전쟁은 시작됐다.
줄을 바꾸면서 새치기를 하는 어른들이 많았다. 2시간을 넘게 기다렸는데 갑자기 뒤로 빠지라니 억울한 면도 있겠지만 새치기를 하는 것은 뒤에 있는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것이다. 70세는 넘어 보이는 노인과 새치기를 한 노인이 언성을 높여 싸우더니 이내 주먹다짐으로 번졌다. 그것도 사람들에 둘러싸여 좁다 못해 공간이 전혀 없는 곳에서 주먹질을 하는 것을 보니 답답했다. 이를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 중 아버지의 목에 앉아가는 꼬마 아이의 눈망울에는 짜증과 피곤함이 보였다. 줄을 바꾸면서 뒤로 밀려 화가 많이 난 한 아주머니는 “역사적인 오늘을 위해 준비가 철저히 되지 않은 것 같다”며 “숭례문 화재 때 속상한 마음보다 지금이 더 속상하다”며 화를 냈다.
숭례문 안으로 들어가기가 참 힘 들었다. 사람들의 질서의식에 질려버렸다. 솔직한 마음에 ‘그냥 들어가지 말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숭례문 안에 들어갔다. 아직 주변정리까지는 마무리 하지 못해 숭례문 내부의 화려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예(禮)’를 숭상하고, 재난을 막아달라는 선조들의 염원을 담았던 숭례문의 현판을 보니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숭례문의 복구를 직접 보는 영광적인 날이기도 하면서 눈을 찡그리게 하는 몇몇 장면들이 불쾌한 현장이었다. 5월 6일부터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숭례문은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 대한민국의 ‘시작’이자 ‘얼’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왔다.
 신현식 기자 shsnice1000@dankook.ac.kr매일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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