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볼펜] 갑과 을
[백색볼펜] 갑과 을
  • 조수진 기자
  • 승인 2013.06.08 03:48
  • 호수 13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갑과 을의 사정을 아십니까

◇안녕하세요. 갑(甲)입니다. 요즘 나쁜 놈이다, 쳐 죽일 놈이다, 뭐 다 맞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갑의 입장에서 갑들을 볼 때에도 등쳐먹는 나쁜 놈들 맞죠. 인턴 쉽게 보고 껄떡거리는 갑, 뒷돈 받는 갑 등 하아, 다 언급하자니 숨이 찹니다. 우선, 대국민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언행들 정말 죄송합니다. 경솔한 갑들이 많았다는 거 인정합니다. 갑중의 갑(이하 ‘갑’)이 얼마 전, “불공정하고 억울한 갑을관계는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며 “건강한 경제 생태계가 되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은 발을 붙일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죠. 조삼모사로 국민들을 우롱한 나쁜 갑들을 대신해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그런데 갑도 못해먹겠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번에 ‘갑’이 미국 방문한 건 아시죠? 안 그래도 방미성과 평가하면서 말 많을 건 뻔한 일, 인사 낙마가 줄줄이 이어지면서 부담이 가중되던 터에 ‘갑’의 1호 인사 윤창중 청와대 전 대변인이 성추행 사건에 휘말리면서 설 자리가 더욱 좁아졌죠. 거기에 일본 유명 주간지에서 방미 패션에 대해 옷이 이렇더라 저렇더라 혹평을 날렸다죠. 인사도 골치 아픈데 옷까지 들먹이니 얼마나 머리가 지끈거리겠습니까. 물론 ‘갑’이 잘했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수첩 공주’다 욕만 하지 마시고 그 애환도 좀 생각해달라는 거죠. 이러나저러나 욕먹는 자리가 ‘갑’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4대악 처단뿐만 아니라 ‘갑’의 이름으로 나쁜 갑들의 처단에도 힘쓰겠습니다. 꾸벅.    

◇안녕하세요. ‘을’입니다. 네, 생각하시는 그 을(乙) 맞습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속담을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대세죠. 요즘 세상이 시끌벅적합니다. 특히 윤 전 대변인 사건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인턴 성폭행이라니. 솔직히 저 사람도 청와대에서는 을 아닙니까? 대변인으로서 청와대 눈칫밥 좀 먹었어야 했는데 청와대 인사 교육 시스템이 의심스럽습니다. ‘수첩’을 철통 보완하니 알 수가 있나 원. 이런 척박한 상황에서 오늘도 인턴을 지원하고 있을 신입들이 생각나는 군요. 신입 ‘을’에게 선배 ‘을’이 해줄 수 있는 말은 진부하기 짝이 없습니다. 첫째, 참아라 둘째, 눈치봐라 셋째, YES맨이 되라. 신입 을들 중 과장, 팀장이 돼서 ‘갑’ 노릇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 많을 텐데, 에라이 다 부질없습니다.

◇을의 모임에 과장, 팀장 급 분들 참 많습니다. 퇴직하라고 할까봐 전전긍긍 꼴이 말이 아닙니다. 집에 있는 토끼 같은 자식들을 위해 까라면 깝니다. 슬픈 현실이죠. 얼마 전, 모 금융사 인턴이 실적 스트레스에 자살을 선택했다죠. 뿐만 아니라 주류업체 대리점주의 자살 소식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이번 사건들을 계기로 국방부에서 계약서에 ‘갑’과 ‘을’이란 용어를 없애기로 결정 했습니다. 실효성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를 발판으로 앞으로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요. 을의 입장에서 을들에게 부탁하건 데 힘들다고 목숨까지 걸진 맙시다. 사는 게 참 더럽고 치사하긴 하지만 또 살만한 게 세상 아니겠습니까?

 <秀>   

조수진 기자
조수진 기자

 ejaqh2@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