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천의 엔딩크레딧] 11. 입 안 가득 가쁜 숨, <트레인스포팅>
[김상천의 엔딩크레딧] 11. 입 안 가득 가쁜 숨, <트레인스포팅>
  • 김상천
  • 승인 2013.07.08 18:27
  • 호수 1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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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괘씸한 세상의 회전… 그냥 확 돌아버릴까?

배가 슬금슬금 나오려는 게 이러다 이티가 될까봐 다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운동장을 달리고 있는데 비가 쏟아졌습니다. 실은 나올 때 가로등 불빛에 가랑비가 비치는 걸 봤지만, 모처럼 습관의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운동이 안전하게 순환하길 바라는 마음에 그냥 나왔습니다. 뛰다가 빗줄기가 굵어지면 그때 들어가도 괜찮으니까요.

그런데 웬 객기를 부리고 싶었는지 그냥 맞으면서 달렸습니다. 장맛비에 흠뻑 젖은 채 한 바퀴 돌 때마다 더 진흙탕이 되어가는 질퍽한 운동장을 혼자 뛰었습니다. 누가 봤으면 정신이 약간 이상한 사람인가 했을 거예요.


이게 다 <트레인스포팅> 때문입니다. 달리러 나오기 직전에 이 영화를 다시 봤거든요. 전 대니 보일 영화는 전부 다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영화를 편애합니다. 세상의 회전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먹이면서 목구멍이 시원하게 내달리는 주인공들을 보고있으면 스크린 밖의 저도 ‘박하사탕을 물고 운동장을 달리는 듯한’ 해방감이 느껴지곤 합니다(소설가 윤성희의 표현입니다). 몸속에 영화로부터 유입된 정서가 남아있었겠죠. 괜히 저도 따라 달리면서 흉내를 내보고 싶었나봐요. 왜 홍콩 무협영화를 보고나면 까불고 싶어지잖아요. 제가 잘 그래요. 본 시리즈 보고나서는 왠지 오줌도 신속하고 절도 있게 싸야 될 것 같았어요.

비가 퍼붓기 시작하던 그 순간, 절묘하게도 헤드폰에서 언더월드의 ‘Born Slippy’가 흘러나왔습니다. 뭐랄까요. 꼭 전구에 불이 켜진 것처럼 캄캄한 운동장 가운데서 뇌속이 환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엔딩에서 쓰인 바로 그 곡이죠. 저에겐 가장 아름다운 단 한 곡의 일렉트로니카는 누가 뭐래도 이 곡입니다. 지산과 글로벌개더링에서 두 번 라이브를 들었지만 또 한번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네요.

대니 보일은 ‘영국 음악’이 메인테마였던 지난번 런던올림픽의 연출을 맡았을 정도로 음악 잘 쓰기로 소문난 감독이죠. 긴장에서 해방으로 옮겨가는 감정의 결이 살아있는 이 영화의 엔딩에 이 곡을 넣은 건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이 곡에선 해방감을 넘어 승리감마저 느껴지죠. 이 영화의 엔딩시퀀스보다 젊음을 제대로 표현한 창작물을 저는 본적이 없습니다. 잊지 못할, 명장면입니다.

한사코 도주하는 주인공들은 세상의 회전을 경멸합니다. “인생을 선택하라, 직업을 선택하라, 가족을 선택하라, 대형TV도 선택하라. 세탁기, 차도 선택하고 CD플레이어와 병따개도 선택하라.” 이런 냉소적인 내레이션으로 영화는 시작하죠. 그리고선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며 세상에 가운데 손가락을 먹입니다. 쉽게 말해 시키는 대로 안 하고 개기는 거죠. 유식한 말로는 카니발리즘이라고 부르더군요. 이데올로기를 거부함으로써 지배시스템의 작동을 멈추는, 말하자면 체제 전복의 근원이 될 수도 있는 에너지인 셈이죠.

   

세상의 작동원리는 회전일 수도 있습니다. 태초를 있게 한 탄생과 죽음이라는 고리. 밟고 있는 행성의 자전과 공전. 행성 위를 순환하는 위성을 타고 내려가면 거기서 자본이 회전하고 있죠. 지배권력의 회전, 욕망의 회전. 상식과 비상식의 교대반복, 혼돈과 안정의 무한반복. 몸속 혈액의 순환, 유기체 속의 적혈구처럼 회전하는 자동차들…. 세상은 46억년이라는 허무에 가까운 시간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돌고 또 돌았습니다.

달리기로 표현된 이 영화의 치기 어린 반항은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순수할 정도로 무모하면 숭고해지는 걸까요. 누군가 묻겠죠. 아니 회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럼 말이 안 되는 건데. 그리곤 어떻게든 돌리려고 하겠죠. 이들이 끝끝내 회전에 합류하지 않으면 누군가 이들 몫의 회전을 감당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유지하겠죠.

오늘따라 저는 괜히 희한한 생각들이 드네요. 왠지 괘씸한 느낌이 들어요. 세상의 이데올로기들을 나는 왜 원죄처럼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가. 내가 동의한 적 없는 무수한 의무와 규율들은 다 뭔가. 어느 누가 무슨 어떤 권리로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가. 절대다수의 우리는 왜 정작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으면서도 신념만은 확고한가. 음. 비를 너무 많이 맞았나봅니다.

영화를 무진장 좋아하는 김상천(영어영문·4)
nounsverb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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