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천의 엔딩크레딧] 12. <꿈의 구장> 다시 출발선 앞에서
[김상천의 엔딩크레딧] 12. <꿈의 구장> 다시 출발선 앞에서
  • 김상천
  • 승인 2013.09.04 18:05
  • 호수 1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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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들린다면 야구장을 지어라

 

방학은 매번 짧네요.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정말 반가워요.

다시 출발선 앞에 무릎 굽혀 앉아서 크게 심호흡을 해봅니다.

일상은 출발한 듯 보이네요. 얼른 정신차리고 따라잡아야겠습니다. 의욕과 동력이 필요할 때 제가 자주 보는 영화가 있습니다.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1989년 영화 <꿈의 구장>이에요. 사실 저는 이 영화에 각별한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앞날이 깜깜해서 매일 밤 뒤척이던 군대 전역 직후, 어느 날 이 영화를 보고 저는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아 이거구나,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해답이구나. 늘 뭐가 걸린 듯 답답하던 목구멍이 시원하게 뚫리며 박하향이 퍼지는 것 같은 느낌이더군요.


주인공 레이는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울고 웃고 기고 걷고 뛰다가 때가 됐다 싶을 때 반항하고 다시 때가 돼서 정신 차려 대학 가고 직장 잡고 결혼해 예쁜 딸을 얻은 일반적인 미국의 소시민입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 줄곧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머리가 커지면서 서로 사이가 틀어졌다는 정도의 성장스토리죠.

그런 레이의 삶에 불현듯 기괴한 일이 벌어집니다. 자기 옥수수밭에서 웬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네가 그걸 짓는다면 그가 찾아올 것이다(If you build it, he will come).”

오직 레이에게만 들리는 이 목소리는 몇날며칠 반복됩니다. 대체 누가 왜 어디서 속삭이는 걸까요. 뭘 지으라는 건지, 누가 온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는데 목소리는 아주 선명합니다. 문득 옥수수밭에서 야구장의 환영을 보게 되는 순간 레이는 깨닫습니다. 그리고 멀쩡한 밭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야구장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황당무계한 생각이죠. 레이는 살짝 정신이 이상해진 걸까요? 스스로도 자신이 혹시 미친 게 아닐지 의심합니다. 부인은 당연히 어이없어하죠. 그러나 결국 레이의 간절함에 설득당하고 맙니다.

자, 이제 진짜로 멀쩡한 옥수수밭을 밀고 야구장을 짓습니다. 저축해둔 돈을 탈탈 털고 생계수단이던 옥수수도 사라져 가계가 흔들리는데도 말이죠. 아이오와 시골바닥의 옥수수밭에 그럴싸한 야구장이 지어졌습니다. 레이는 기다립니다. 매일 창가에서 야구장의 바라봅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동안 계절은 몇 번이나 바뀌었고 융자금이 밀려 재정은 심각한 상황이 됐습니다. 레이는 좌절합니다. 그때 레이의 딸아이가 말하죠.

“아빠, 밖에 누가 있어요.”

야구장에 1951년에 죽은 야구선수 ‘맨발의 조’ 조 잭슨이 서있습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하얀 스트라이프 유니폼을 갖춰입고 왼손에 글러브를 낀 전성기 모습 그대로네요. 그토록 기다린 일이었지만, 막상 이 얼떨떨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자 레이는 어안이 벙벙합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니까요. 옥수수밭에서 야구선수 유령이 나오다니요. 엄마한테 동화책 읽어달라고 보채던 또래들과 달리 엄마를 일찍 여읜 레이는 아버지가 들려주는 야구 얘기를 들으며 잠들곤 했습니다. ‘맨발의 조’는 아버지가 입이 닳도록 칭찬하던 바로 그 선수였죠. 4할이 넘는 타율에 기록을 밥 먹듯이 세웠지만 승부조작에 휘말려 영구제명당한 비운의 선수입니다(맞습니다 블랙삭스 스캔들).


레이와 타격연습을 하고서 조는 묻습니다. “다시 와도 되나요?” 그리고 옥수수밭으로 사라지다 문득 고개를 돌려 다시 묻습니다. “저기요, 여기가 천국인가요?”

줄거리 소개로 때우는 영화칼럼을 좋아하지 않아서 줄곧 피해왔지만 이 영화엔 사족을 달고 싶지 않네요. 직접 보시면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말씀만 드리고 싶습니다. 야구를 아신다면 더할나위없고, 몰라도 전혀 문제없습니다. 저도 야구 몰라요. 소개해드린 내용은 초반 25분도 안됩니다. 목소리의 의미가 뭘까요. 뒷얘기 안 궁금하세요?

 

영화 좋아하는 김상천(영어영문·4)
nounsverb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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