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천의 엔딩크레딧] 16. <피아니스트>와 『생존자』
[김상천의 엔딩크레딧] 16. <피아니스트>와 『생존자』
  • 김상천
  • 승인 2013.10.10 15:07
  • 호수 1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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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행복하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테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를 읽고 나서 며칠 후에 세 권을 주문했습니다. 한 권은 제가 갖고 나머지 두 권은 선물하고 싶어서요. 이 책은 나찌와 소련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을 담고 있습니다. 단순히 어떻게 살아남았고 혹사당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아니었습니다. 살면서 아주 가끔씩 만날 수 있는, 울림이 너무 깊어서 한동안 그에 관한 생각을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내용이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인간다움이란 과연 무엇인지 멍하니 거대한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쏟아지는 생각들을 허겁지겁 주워담다 보니 문득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느꼈던 먹먹함이 기억났습니다. 『생존자』의 구성처럼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실존 유대인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영화죠. 1933년생인 폴란스키 감독 역시 역사의 암흑기를 겪어낸 장본인입니다. 어머니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여위었고, 8살 때 게토를 탈출한 이례로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여러 홀로코스트 영화들 중에 유독 이 영화의 울림이 큰 이유는 진정성 때문일 것입니다.


스필만(애드리언 브로디)은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도움에 힘입어 겨우 살아남습니다. 나찌와 허기와 추위와 고독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살리려는 조건 없는 노력 때문이었습니다. 『생존자』가 됐건 <피아니스트>가 됐건 아니면 <쉰들러 리스트>가 됐건, 결국 모든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한 줄로 꿰는 핵심은 바로 이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살리려는 조건 없는 노력’인 것 같네요. 살아남은 모든 생명들은 여러 생명을 등에 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멍하니 생각하다보면 놀라워요. 어떻게 그 사람들은 자기 목을 걸고 남을 도울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총구 앞에서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기 생명을 담보로 남을 도울 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또 거대한 광기에 휩쓸려 억울하게 죽어간 생때같은 생명들은 잠자리에 누워서 어떤 세상을 소망했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게 엄청난 일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됩니다. 그것도 풍요 속에서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류역사를 통틀어 가장 살기 좋은 시대일 것입니다. 이렇게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된 지도 불과 200년밖에 안되었죠. 무엇보다 지금은 천적도 없고 전쟁도 없는 안전한 시대잖아요. 보완해야할 점이 많긴 하지만 평등에 가까운 민주주의 시대이기도 하죠. 온 인류역사가 간절히 바래온 소원은 우리가 딛고 서있는 이 세계일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자의 책임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이 시대를 물려주기 위해 참혹하게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면서 끝까지 살아내지 않거나 욕심 때문에 불행하게 사는 것은 얼마나 잔혹한 배신일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를 괴롭게 하는 고민이란 것들은 실은 아주 작은 점 위에 찍힌 아주 작은 점 하나만큼도 안 되는 문제들이 아닐까요.

행복을 추구하는데 죄책감 갖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님 기대를 배신하지 않을만한 직장도 중요하고, 꿀리지 않을 옷과 자동차도 좋지만요. 고생 많던 부모님 인생과는 달리 태평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진짜 효도일 수도 있다고, 과시욕을 채우기 위한 물건들을 사모으려고 일하다 늙는 건 촌스러운 삶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건 권리이자 목표일뿐만 아니라 의무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영화 좋아하는 김상천
nounsverb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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