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천의 엔딩크레딧] 17. 마케팅이 아쉬운 좋은 영화 <나는 공무원이다>
[김상천의 엔딩크레딧] 17. 마케팅이 아쉬운 좋은 영화 <나는 공무원이다>
  • 김상천
  • 승인 2013.10.17 18:19
  • 호수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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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과 꿈, 두 섬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웃음과 락 음악



<컨저링>을 보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아니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라던 포스터는 대체 뭐였죠? <파라노말 액티비티> 정도이겠거니 생각하고 봤다가 심약한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줄 알았습니다. 무서운 장면 겁나게 많이 나오더군요. ‘잔인한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설마 진짜 욕먹을 각오로 낚시를 한 건지 궁금해하다 홍보사 홈페이지에 들어가봤습니다. 대문에 이렇게 써있더군요. “마케팅은 설득이다. 혹은 유혹이다. 때로는 정보이며 가끔은 속임수이다.” 낚인 거네요. 아, 증말.

영화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어떻게든 BP만 넘기고보자’는 속내가 훤한 유치한 마케팅들이 느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어떤 홍보사들은 허위사실로 관객을 우롱하면서도 마케팅이라고 자기합리화 하는 것 같아요. 더 속상한 일은 이런 마케팅전략은 영화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기 때문에 때로 영화를 해치기까지 한다는 사실입니다. 일례로 <후궁>이 그랬습니다. 핏빛 광기를 그린 영화였지만 관객들은 살색만 찾았죠. 에로틱마케팅으로 돈은 벌었겠지만 열연한 배우들이 보기 안타까웠습니다.


마케팅 때문에 저평가된 영화들 중에서, 저는 구자홍 감독의 <나는 공무원이다>를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삼류 같은 제목과 트렌드에 함몰된 마케팅 때문에 묻혔지만 좋은 영화입니다. ‘웃겨야한다’는 강박에서 이토록 자유로운데도 이렇게까지 웃긴 코미디영화가 우리나라에 몇 편이나 있었는가 싶네요. 마포구청 환경과 직원이 홍대 인디밴드와 얽히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리얼리티를 살려 그린 코미디 영화인데요. 저질 코미디가 아니라 상념 속에서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는 영화입니다.

차분한 연출과 찰진 대사, 저예산의 한계를 보완하는 세련된 편집, 윤제문의 능구렁이같은 연기, 장영규의 음악 등 어디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는데다 오광록, 고창석, 박해일의 카메오 출연을 보는 재미까지. 저는 이 영화가 <다크 나이트 라이즈> <어메이징 스파이더맨>같이 힘센 영화들 사이에서 BP를 넘긴 것은 결코 마케팅 때문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 영화 속 드러머 영진(가운데)을 연기한 사람은 실제 인디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의 드럼을 맡고 있는 서현정 씨입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담백하게 현실을 그립니다. 아마 그게 이 영화의 강점이자 약점일 것입니다. 웃음과 감동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받지만, 반대로 똑같은 이유로 낯설어하는 관객들도 있더군요. <즐거운 인생>같이 배터지게 한상 벌여주는 연출법을 기대했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밥과 꿈’이라는 두 섬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세월을 거쳐본 사람이라면, 아마 이 영화의 엔딩크레딧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윤제문의 연기와 찰진 대사가 아주 재밌습니다. 한 부분만 소개해드려볼까요. 공무원 한재희(윤제문)는 해체 위기에 놓인 인디밴드 멤버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니들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쩔려 그러냐? 하필이면 세계에서 제일 센 아이돌강국, 인터넷왕국에 태어나서 이런 걸 하겠다니… 걸그룹은 수출해서 달라라도 벌어오는데. 투애니원, 소시 유투브 조회수가 천만 명이라지? 근데 니들은 뭐야. 수출도 안 돼, 내수도 안 돼. 사람들 음악 듣는 수준이 낮다고 불평들만 하고. 해먹을 게 없어서 온 나라가 기를 쓰는 이 피곤한 나라에서 한쪽으로 음악 쏠린 거? 난 당연하다고 봐.”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묻자 한재희는 또 이렇게 답하죠.

“인터넷 보면 애들이 대세는 아이유, 뭐 대세는 뭐뭐, 그러잖아. 그게 대세야. 이 나라에서 살려면 적어도 게임의 룰 정도는 알아야겠지? 그럼 1등은 못해도 낙오는 안 돼. 그럼 된 거 아냐? 네이버 실시간검색어처럼 살아야 된다고. 대세 체크하면서. 안 그럼 왕따 된다고. 우리 공무원도 대세 잘 봐야 돼. 영혼? 없어. 똑같애. 안 그럼 한방에 훅 간다고. 대한민국은 말이야, 테레비 안 나오면 아예 없는 거야.”

영화 좋아하는 김상천
nounsverb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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