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人生에 가을이 오면
내 人生에 가을이 오면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3.10.25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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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人生에 가을이 오면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내 人生에 가을이 오면’ - 이 말은 윤동주(尹東柱 : 1917~1945) 시인이 남긴 시(詩)의 제목이다.

  그는 이 시의 첫 연에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가 있습니다”로 시작하여,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로 스스로 물음을 던지고, “그 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 온 힘을 다하며 살겠습니다”라고 답변하고 있다.

 

  作家의 성실한 삶을 그리다

 

  작가는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라고 물음을 던지고, “내 마음의 밭에 생각의 씨를 뿌려 /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 키워야 하겠습니다”라고 끝을 맺는다.

  이 시는 시인 윤동주의 성실한 삶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 시의 전편에 사랑과 자기성찰(自己省察)을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삶은 「서시」(序詩)에도 그대로 베어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시를 통해서 윤동주의 순수하고 진실됨을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의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고뇌와 진솔함이 보인다.

 

  윤동주! 그는 1917년 암울했던 일제의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짧은 일생을 고뇌하면서 살다가 갔다. 그는 1943년 일본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하던 중 일제에 의해 사상범(思想犯)으로 몰려 2년형을 선고받고,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복역 중 1945년 2월 16일 29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獄死)했다. 그는 복역 중에 건강이 악화되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아침마다 일어나면 형무소의 창살을 잡고 “한국(韓國)아!”를 외쳤다고 한다. 그의 조국에 대한 사랑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은 오로지 조국의 독립만을 바라보면서 살다가 갔다. 그는 그렇게도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국(異國)의 하늘 아래서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祖國에 대한 사랑을 詩로 옮기다

 

  윤동주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북간도(北間島)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나 이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부지불식간에 민족의 비애(悲哀)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성장하였다.

  이 곳 북간도는 한일병합(韓日倂合) 후 국내에서 뜻을 펼 수 없게 된 우리의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이 모여든 항일운동(抗日運動)의 터전이었다. 특히, 북간도는 윤동주의 외숙부인 규암(圭巖) 김약연(金躍淵)이 1899년(光武 3년)에 한인촌(韓人村)을 건설하고, 규암재(圭巖齋)라는 사숙(私塾)을 세워 청년교육을 하고 있던 곳이기도 하였다. 이 무렵, 이상설(李相卨) ‧ 이회영(李會榮) ‧ 이동녕(李東寧) 등이 용정(龍井)에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세우게 되니, 북간도는 한인청년들의 교육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 뒤에 명동서숙(明東書塾)으로 이어지면서 교육의 열기는 더해갔다. 그리고, 김약연이 숙장(塾長)을 맡아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데 심혈을 기울렸음은 물론이었다.

  뿐만 아니라, 1912년에는 북간도에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간민회(墾民會)가 결성되고, 김약연이 회장직을 맡으면서 한인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철저하게 심어주었다고 한다.

  윤동주는 이 곳에서 민족교육의 거점인 명동(明東) 소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4학년 때부터는 그의 고종4촌인 송몽규(宋夢奎)와 어울리면서 문학에 꿈을 키워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들은 서울에서 발간되는 어린이 잡지를 구해 읽으면서 문학에 빠져들었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문학적 소양을 키워갔던 윤동주는 스물두살이 되던 1938년에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 문과에 입학하여, 시인의 꿈을 키워갔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때 이양하(李敭河) 교수의 영문학 강의는 윤동주로 하여금 시인으로 성장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리고, 윤동주의 조국을 생각하는 일념은 외숙부인 규암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규암은 학교 작문시간에 학생의 글에 ‘독립’이라는 말이 안 나오면 점수를 주지 않았다고 하는데(尹永春 “荒蕪地에 세운 旗幅 : 金躍淵” 「韓國의 人間像 6」), 윤동주 또한 이러한 규암의 영향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윤동주는 짧은 일생동안 많지 않은 시를 남겼는데, 그의 사후(死後)인 1948년에 30편의 시를 묶어 유고시집(遺稿詩集)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출간되면서 그는 일약 일제의 저항시인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특히,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故鄕)’, ‘십자가’(十字架), ‘슬픈 족속(族屬)’, ‘별 헤는 밤’ 등에는 망국(亡國)의 한(恨)과 자기성찰, 그리고 조국광복에 대한 그의 애절함을 담고 있다.

 

  지난 20일, 윤동주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는 ‘윤동주 시비’를 둘러보면서, 그의 처절했던 삶과 시 세계를 상상해보았다. “그가 이 동산을 거닐며 지은 구슬같은 시들은 암흑기 민족문학의 마지막 등불로서 겨레의 가슴을 울리고 ‧ ‧ ‧” 이는 윤동주의 시비(詩碑) 뒷면에 새겨져 있는 시비 건립취지문의 일부이다. 민족의 수난기(受難期)를 살다간 시인의 발자취를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윤동주의 시비를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기면서, 문득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 BC. 460~357)가 남긴 명언,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를 머리 속으로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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