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볼펜: 이만큼
백색볼펜: 이만큼
  • 이호연 기자
  • 승인 2013.10.30 22:18
  • 호수 1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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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만큼입니다

백색볼펜
이만큼

안녕하세요 이만큼입니다

◇ 이만큼, 이보다, 이렇게.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나기도 전에 미리 생각해둔 아들들의 이름이라고 한다. 비록 딸로만 셋. 그것도 막내는 예정보다 10년 쯤 늦게 태어나 아버지의 바람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이 세 이름을 손자들에게 선물하려고 계획 중이시다. 이름 자체로 놀림감이 될까 우려하신 어머니의 만류가 아니었다면 내 이름이 되었을 ‘이만큼’을 국어사전에 검색해본 적이 있다. ‘이만한 정도(로)’라는 사전 상의 뜻은 사실 조금 애매하다. 하지만 보통은 그 앞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벌써’, ‘아직’ 등의 부사가 붙게 되고, 그 덕분에 ‘이만큼’의 의미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분명하게 인식되곤 한다. 아마 아버지가 바라던 의미도 이러한 게 아니었을까.
◇ 이번 학기 첫 번째 신문이 만들어졌다. 언제나 만드는 신문에 책임감을 가졌지만 이번엔 여태까지의 신문보다 훨씬 큰 책임감이 따랐기 때문일까, 유독 여기저기 많이 쫓기면서 만들어냈다. 그리고 나를 쫓아오던 가장 위협적인 상대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얼마 전에 들었던 한의사 선생님의 진단에 따르면 나는 기본적으로 걱정과 짜증이 많은 체질이라고 한다. 사실 나는 벌써 이만큼이나 취재가 됐고 딱 이만큼만 해도 만족할 결과가 나온다는 걸 알고 있다. 모든 쫓김은 쓸모없는 기우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앞으로 수십 번 더 신문을 만들 때마다 군걱정을 내려놓고, 아버지가 내게 준 ‘이만큼’의 의미를 매번 기억해야겠다. “벌써 이만큼이나 했잖아!”
◇ 좋아하는 노래 중에 커피소년의 ‘That’s Nothing’이라는 곡이 있다. 부끄럽지만 ‘시간 지나면 웃을 수 있는걸 너도 너무 잘 알잖아’라는 위로의 가사를 들으며 눈물을 훔쳤던 적도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1차로 원서를 넣었던 대학들에서 몽땅 불합격의 통지를 받았던 적이 있다. 가장 친한 친구 두 명과 온갖 불안을 서로에게 털어놓으며 위로를 받았다. 그런데 웃긴 건, 우리 셋 모두 그 때 나눈 대화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저 가사가 맞다. 어쨌든 우린 모두 대학생이 됐고, 지금도 한 달에 두 번 이상씩은 꼭 만나며 함께 웃고 있다. 지금 무언가 괴로운 고민을 하는 분이 있다면 조금만 시간을 두고 기다려보길 바란다. “아직 이만큼밖에 안 해봤을 뿐이잖아!”
◇ 개강이다. 9월이 시작됐고 어느덧 아침과 밤에는 시원한 바람이 분다. 가을은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인 것 같다. 그리고 생각이 많아질수록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다. 누군가는 돈에서 위로를 받고, 누군가는 책에서 격려를 받는다. 하지만 보편적인 사실 하나는 누구에게나 말 한 마디가 큰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만큼’이라는 말의 의미는 실로 대단하다. 딱 이만큼만 하라는 말도, 벌써 이만큼이나 했다는 말도, 아직 이만큼밖에 안 해봤다는 말도 모두 위로와 격려가 된다. 가을에는 소중한 사람에게 ‘이만큼’을 전해줬으면 한다. “그대는 이만큼이나 멋진 사람입니다!” 
 <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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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story3253@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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