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천의 엔딩크레딧] 18. 하이쿠처럼 간결하고 아름다운 은유 <그래비티>
[김상천의 엔딩크레딧] 18. 하이쿠처럼 간결하고 아름다운 은유 <그래비티>
  • 김상천
  • 승인 2013.11.05 14:34
  • 호수 1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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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미래일지 모를 ‘공감각적 충격’을 경험하다


나비가 난다
마치 이런 세상에
실망한 듯이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


제가 좋아하는 하이쿠입니다. 영화 초반 우주를 유영하는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에게 매트(조지 클루니)는 “우주에 나와서 가장 좋은 점이 뭐냐”고 묻습니다. 스톤 박사는 표정없는 얼굴로 “적막”이라 잘라 말합니다. 푸른 행성의 경이로운 절경을 앞에 두고도 말이죠. 그 모습이 꼭 시 속의 실망한 나비 같아서 이 하이쿠가 떠올랐습니다.

하이쿠는 간결함이 아름답습니다. 한 줄의 유혹으로 읽는 사람을 여백 속에 스며들게 하죠.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는 하이쿠 같은 영화입니다. 영화 전체가 생명에 대한 아름다운 한 줄의 은유입니다. 좋은 은유는 답이 아니라 질문이어야 한다는 말이 있죠. 이 은유가 진실한 질문이기 때문이 이 영화는 아름답습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시를 읽을 때처럼 근원적인 질문들 속에 잠기게 만듭니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허블망원경을 손보던 우주비행사가 우주 잔해와의 충돌이라는 불의의 사고로 우주에서 조난당해 우여곡절 끝에 지구로 귀환한다.’ 영화 전체에 등장인물은 세 명(과 한 명의 시체 엑스트라)뿐입니다. 그중 한 명은 거의 시작마자 죽죠. 사실상 영화에 제대로 나오는 사람은 두 명뿐입니다. 미니멀리즘이라는 말이 더 이상 잘 어울릴 수가 없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미니멀리즘은 이전의 영화들이 보여준 것과는 말 그대로 차원이 다릅니다. <더 문>이나 <베리드> 같은 영화가 2차원(평면)의 미니멀리즘을 보여줬다면 이 영화의 무대는 3차원, 즉 입체의 세계입니다. 영화의 미래를 얼핏 본 것 같다고 말하면 과장일까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실제로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컴퓨터 화면보호기를 켜놓으면 3D 문장 하나가 모니터 속을 헤엄치잖아요. 꼭 그런 이미지였다고 할까요. 다른 영화들이 보여준 미니멀리즘이 노트에 적힌 한 줄이었다고 한다면, 이 영화의 것은 전방위로 회전하는 입체적인 한 줄이었습니다. 시처럼 간결하고 아름다운 한 줄의 은유가 입체의 형태로 우주 속을 유영하는 이미지로 남았습니다.

▲ 땅 아래 묻힌 관 속에 갖힌 주인공의 생존기 <베리드>.

▲ <그래비티> 이전까지 '가장 미니멀한 우주영화'라는 타이틀을 지켜온 <더 문>.

‘공감각적 충격’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이 영화의 입체성은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우주에서 지구의 푸름을 내려다보는 넓은 앵글로 출발해서 스톤 박사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당긴 후, 헬멧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시점을 보여준 뒤에 다시 멀리서 바라보는 앵글로 되돌아가는 롱테이크가 펼쳐집니다. 즉시 아이맥스로 보길 잘했다는 안도감이 들더군요. 이제껏 적지 않은 영화를 봐오면서 난생 처음 느껴본 입체적 감동이었습니다. LPG가스통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습니다. 아, 이제 영화계는 복잡한 플롯을 만들 필요 없이 미니멀한 이야기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는 기술력을 갖췄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본 후부터 내내 가지고 있던 ‘진짜 리얼한 우주영화를 보고싶다’는 소망을 이 영화가 실현해줬다는 사실입니다. 스토리를 이끌어가기 위한 설정들을 제외하면 이 영화의 리얼리티는 감동적일 정도로 꼼꼼합니다. 많은 영화들 속에서 우주선이 날아갈 때 들리는 효과음은 사실 실제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주는 진공상태라 소리를 전달해줄 물질이 없기 때문이죠. 이 영화에선 이런 리얼리티들이 하나하나 실제처럼 구현됐습니다. 현존하는 모든 영화들 중에서 가장 우주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영화라 말씀드려도 틀리지 않을 것 같네요. 멕시코 기자회견장에서는 한 기자가 “우주에서 촬영하는 기분은 어떻습니까. 촬영감독은 어지러움을 느끼지 않았나요?”라고 질문했을 정도죠.

▲ 이렇게 섹시한 이모는 처음 봤습니다.

‘Less is more’이라는 아포리즘이 있죠. 다른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끊임없이 관객의 상상을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경이롭네요. 인간의 상상력보다 월등한 3D는 있을 수 없으니까요. 현란한 기교를 보여주려고 기술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어서 기술을 사용한 보기 드문 영화입니다. 하이쿠 같이 간결한 단 한 줄의 메타포를 표현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걸 또 이토록 스릴있고 빨려들게 만들어 상업영화로서의 기대치까지 충족시킨 영화라니요. 오랜만에 정말 엄청난 영화를 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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