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마니 7. 영화 <여자, 정혜>
심마니 7. 영화 <여자, 정혜>
  • 송미라(연우심리상담센터) 소장
  • 승인 2013.11.12 11:50
  • 호수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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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하게 갇힌 영혼
 지난 호에 이어 어린 시절 성폭력 경험으로 자신을 가두고 사는 한 여자의 삶이 그려진 한국 영화 한 편을 떠올려 봤다.

 “상처 입은 그 여자가 스스로를 가둔 방안에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게 해주고 싶었다”고 감독이 전제했듯이 영화는 어떤 기교도 없이 숨 막히는 침묵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우체국 여직원 정혜(김지수)는 자신의 일만큼이나 단조로운 일상을 보낸다. 그녀의 작은 집엔 어린 고양이 한 마리와 TV 홈쇼핑으로 사들인 물건 뿐, 찾아올 이도 찾아갈 사람도 없다.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그녀는 혼자서 조용히 살고 있다. 그런 정혜에게 어느 날 사랑이 찾아온다. 정혜는 용기 내어 남자에게 저녁식사 초대를 하지만, 그는 오지 않는다. 상처받은 정혜가 남자에 대한 마음을 접기로 했을 때, 남자는 조심스럽게 정혜에게 다가온다. 정혜는 사랑할 수 있는 희망이 자신에게 찾아오고 있음을 느낀다.

 주인공 정혜는 영화가 이어지는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며 나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우울과 상실감을 느끼며 상당히 다운되는 경험을 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 전체가 주는 느낌은 회색빛의 희망이라곤 전혀 없는 암울함 그 자체였다. 가끔 사소하게 흔들리는 주인공의 눈망울만이 감정을 자극할 뿐 그 어떤 장치도 없고, 가끔 발생하는 자극조차도 무미건조함으로 희석하는 주인공의 무표정은 안쓰럽다 못해 삶의 주도권을 완전히 발탁당한 듯한 처절함도 느껴진다. 기뻐도 크게 웃지 않고, 슬퍼도 통곡하지 않고, 모든 주장과 표현을 다 지워내고 살고 있는 정혜. 어린 시절 친척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그 이후로 암울함에 사로잡혀 자신의 아픔을 지겹도록 곱씹으며 절망 속에 자신을 내 팽긴 채 단지 식물과 동물에만 마음 한 칸을 내어 주고 사는 정혜지만, 어느 날 술자리에서 만난 남자를 따라가서 흐느낌을 안아주고 자살할까봐 칼을 치워주는 모습은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인간적인 사랑의 모습이었다. 그 칼을 들고 자신을 성폭력한 친척을 찾아가서 칼을 꺼내려하다가 이내 멈추고 드디어 오열하는 정혜 모습이 나온다. 그나마 살아 있는 감정의 끈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경험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의 감정을 마비시키고 삶을 한 없이 무미건조하게 만든다. 사사롭게 발생하는 자극에도 자신을 감정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극단적으로 노력하다보니 제한적이고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언제 자신의 분노가, 언제 자신의 감정 억압이 풀려날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다 그러한 감정이 풀릴 때면 감정이 해소되기 보다는 또 다시 상처를 받게 되는 경험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사람에 대한 신뢰는 없고 강력한 자책감마저 가지고 있어서 늘 불안정한 상태에 있기에 이 무의식적 불안까지 누르고 살아야 하는 삶은 얼마나 절제 되어야 할지, 얼마나 감정을 마비시키며 살아야 할지….

 영화에서 정혜가 감정을 보이는 대상은 초반에는 식물과 고양이었으며, 영화 끝 무렵에는 사람으로 이동되고 있다. 화분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존재이면서 움직일 수 없고 더 이상 정혜에게 요구하지도 않기 때문에 정혜 곁에 있을 수 있었다. 고양이는 정혜가 스스로 외부로부터 가져온 첫 대상으로,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정혜는 이를 수용하고 고양이를 인정하면서 작은 행복을 느끼기 시작한다.

 정혜와 같이 상처가 깊은 사람은 망설임이 많다. 자신의 에너지 이상으로 계속 묻고 요구하는 동료들, 주변인을 대상으로는 섣불리 손을 내밀 수 없다. 준비된 것보다 더 많이 요구하고 그래서 서로 힘들어지면 또 다시 손을 거두게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주변인들이 기다려준다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적절하게 관계하며 옆에 있어준다면 용기를 내서 사람에게도 손을 내밀지도 모른다. 정혜와 같이.

송미라(연우심리상담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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