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복원된 덕수궁 중명전
2010년 복원된 덕수궁 중명전
  • 최형균
  • 승인 2013.11.12 13:09
  • 호수 1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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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헤이그
특사파견이 이뤄진 곳
민간에게 팔리고 떠돌아
다닌 아픔의 기억
널리 알리는 노력 필요해


대한제국의 한이 서린 중명전에 서다

‘중명전’을 방문하려 덕수궁 홈페이지를 방문했다. 그곳에는 주말에 중명전 관람을 위해선 인터넷 사전예약이 필요하다고 안내돼 있었다. 이에 원하는 10일과 11일을 선택했지만 모두 휴관일로 나왔다. 다른 날짜를 선택해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넷을 검색해 봤지만 보수공사를 한다는 기사도 없었다. 사이트 오류라 생각하고 비오는 9일 오후에 2호선 시청역 1번 출구를 나섰다.
마침 출구를 나오니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대한문 앞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교대의식은 개식 타고, 군호응대, 교대의식, 중엄, 상엄, 순라로 이뤄져있다. 한국·중국·일본어로 교대의식의 진행상황이 마이크를 통해 전파되는 와중에 행인들이 우산을 쓰고 성시를 이뤘다. 엄고수가 북을 치며 취라적이 군악을 연주하는 모습이 형형색색으로 물들면서 후번 수문군장과 수문군들에게 경비 임무가 인수·인계됐다. 조선 시대의 경국대전엔 없지만 세부기록을 뒤져 의식을 벌이는 모습에서 문화재를 끝까지 보전하려는 의식이 엿보였다.
덕수궁 왼쪽 돌길을 걸어 사거리를 지나기 전 시청역 부근을 개략적으로 보여주는 시설물이 보였다. 좀 더 빠른 길이 없나 살폈는데 중명전의 정확한 위치는 나와 있지 않았다. 미국 대사관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이라 안 나올 리가 없어서 유심히 봤지만 역시 두 곳의 위치 모두 없었다. 덕수궁에 속하는 중명전이지만 두 건물 사이에 많은 민간건물이 즐비해 찾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지도어플을 나침반 삼아 정동극장을 지나니 작은 표지판이 나 있었다. 표지판엔 ‘중명전’이란 글자가 쓰여 있었다. 행인들은 “중명전이 뭐하는 곳이지?”라고 연신 의문을 표하면서 그곳을 지나칠 만큼 간략한 표지판이었다. 골목길은 음식점, 거주지로 구성돼 있었다. 그 길을 지나니 중명전의 모습이 보였다. 담벼락의 문을 지나 관리사무소에 가서 사전예약을 못하고 왔다고 사정을 설명하니 관리인은 “그냥 들어가도 된다”고 말했다.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해야하지 않냐고 재차 물어보니 “원래 그런거니 들어가셔도 됩니다”고 다시 말했다. 경비원은 이런 질문을 여러 차례 들어본 듯 태연하게 대답을 했다. 이에 본 건물의 정문으로 향했다.
중명전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서구식 색채를 띠고 있었다. 테라스에 창문을 상하식으로 여닫을 수 있게 됐는데 그 모습이 근대 서양 중산층의 가정집을 연상케 했다. 다만 문화재청에 게재된 사진과는 다른 모습이어서 의아함이 들었다. 주위에는 고층빌딩이 힐끗 보였으며 바로 옆에는 미국 대사관이 위치하고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러시아 대사관과 캐나다 대사관이 위치하고 있었다. 서양열강에 사이에 낀 채 나라의 운명을 걱정한 대한제국의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포위돼있는 모습이었다.
중명전은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 지역을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편입해 1897년 황실도서관 용도로 건축됐다. 이후 경운궁(현 덕수궁)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고종황제가 거처로 삼았으며 을사늑약이 이뤄지고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 이상설을 특사로 파견한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역사가 깊은 곳이다. 한일병탄 뒤에는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사용되다가 이승만 대통령 시기에 국유재산으로 편입됐다. 이후 화재로 전소되기도 했으며 재건 뒤에 민간에게 팔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 됐지만 2003년 정동극장에서 매입한 뒤 2006년 문화재청 관리전환, 2007년엔 덕수궁에 재편입 된 뒤 2010년 복원이 완료됐다. 대한제국의 한을 경험하고 다사다난한 세월을 이겨낸 역사적 건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정문에 들어서려고 하니 입장객들이 흙묻은 신발을 슬리퍼로 바꿔신는 것이 보였다. “문화재 관리 차원”이라고 자원봉사자가 말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복도바닥에는 유리가 덮여있었다. 역시 훼손방지를 위해 설치한 것이다. 러시아 양식의 타일 왼쪽에 1개, 오른쪽 2개의 방이 위치해 있었다. 먼저 오른쪽 첫 번째 방에 들어가니 중명전의 역사와 덕수궁 주변이 간략하게 기록돼 있었다. 동행한 해설사 강영성씨는 중명전에 대해 “이름은 ‘거듭 밝음’이란 뜻으로 당시의 암울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고종의 희망이 깃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전 덕수궁 영역을 표시한 지도가 있었는데 지금보다 훨씬 넓어보였다. 강씨는 “일제가 강제병탄 이후에 덕수궁영역을 축소했기에 그렇다”고 얘기했다. 설명을 들으니 중명전과 덕수궁 사이에 상가와 민가가 즐비해 두 건물이 다른 건물이라고 느껴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왼쪽 방에는 을사늑약이 진행되기까지의 사건과 과정이 소개돼 있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될 당시의 상황을 증언한 외국대사들의 상황이 소개돼 있었는데, 밖에서도 그 소란스러움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니 일본이 얼마나 위협을 가했을지 상상이 됐다. 중앙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복사본이 놓여있었다. 강씨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 수 있다”면서 “17일에 체결된 것으로 나오지만 수정을 거치면서 실제로는 18일 새벽 1시에 도장이 찍혔다. 또한 조약 당사국도 제대로 명시해 놓지 않은 엉터리 조약”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 방은 작은 방과 큰 방이 연결돼 있었다. 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한 고종의 노력의 일환이었던 헤이그 특사파견 과정이 전시돼 있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으로 이뤄진 특사단이 6월에 출발해 한달이 넘는 기간 동안 독일, 미국 등에 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활동을 하면서 헤이그에 겨우 도착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한 상황을 외신 보도와 더불어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헤이그 특사 탄원서에 쓰인 이상설의 서명은 지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고급스러웠다. 이에 대해 강씨는 “흔히들 고종이 아무런 지식도 없는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의욕만 앞섰다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며 “고종은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전차를 들였으며 육영공원에서 국어와 국사를 제외한 전 과목을 영어로 강의하게 한 만큼 개방적인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당시 독일에 전해진 외교관들의 서신을 봐도 일본관리는 일본어를 그대로 썼지만 우리나라의 관리는 독일어로 제출했다”면서 “고종과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했다.
해설이 끝나고 난 뒤 강씨는 방문객 현황에 대해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많이 와서 보는데, 대학생들이 제일 적게 온다”며 “막상 오더라도 사진 몇 개와 배너를 훑어보고 간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또한 “일부 외국인들은 우리보다 더 역사를 자세히 알고 있다”며 “중명전과 같이 소외된 문화재를 더욱 알려야한다”고 주장했다.
초등학생들을 인솔하는 교사 김이선씨는 “비록 잘 알려지지 않은 공간이지만 아이들에게 역사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해 왔다”며 “최근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소란스러운 만큼 역사를 간직한 문화재에 대한 소중함을 모두가 인지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중명전을 나서서 대한문 앞을 지나니 수문장 교대의식이 다시 열렸다. 다시금 인파들이 모여들어 이 의식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예약시스템과 중명전의 위치, 사진도 제대로 게재하지 않은 문화재청의 행정적 결함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대한문이 중명전보다 유명해서 이런 의식복원에도 신경을 쓸 순 있다. 다만 역사의 고통이 서린 곳을 더욱 널리 알리고 보존하는 길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최형균 기자 capcomx6@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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