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천의 엔딩크레딧] 19. 영화 속 최고의 악당은 누구인가
[김상천의 엔딩크레딧] 19. 영화 속 최고의 악당은 누구인가
  • 김상천
  • 승인 2013.11.12 22:51
  • 호수 1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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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있어야 진짜 악당이다

지난주에 하이쿠까지 넣어가며 잔뜩 각 잡고 쓴 것 같아서 이번엔 그냥 소소하게 수다나 떨어볼까 합니다. 실은 요즘엔 못된 놈들 나오는 영화만 골라서 다시보고 있습니다. 어떤 무의식이 작용한 건지, 멋있는 악역들의 연기를 다시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맴돌아서요. 이상하게도 아침에 지하철만 타면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마침 오랜만에 여유도 생기고 해서 먹다 남은 피자, 김빠진 맥주와 함께 느긋하게 예전 영화들을 즐기며 지극히 주관적인 영화 속 최고의 악당 베스트3를 꼽아봤습니다.


3위는 <배트맨 다크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입니다. 아마 히스 레저의 조커에게 ‘당연히’ 1위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를 욕할 사람들도 꽤 있을 것 같네요. 히스 레저는 관객을 홀리는 연기를 보여주고 돌연 세상을 등지며 이 캐릭터를 범접할 수 없는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죠. 모든 것을 조롱의 대상으로 여기며 체제 바깥에서 체제 안을 비웃는 조커는 배트맨의 배척점에 서있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완전하지 않다고 판단해 법 바깥에서 암약하는 배트맨도 결국은 자신과 다르지 않은 존재라며 비웃죠. 이 동질성을 증명하는 ‘재미’만이 악행의 유일한 목적인 조커는 그야말로 순수악입니다. 조커의 마지막 대사가 “언젠간 다시 또 보게 될 거야”였다는 사실이 더 애잔한 마음이 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2위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킬러,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입니다. 쉬거는 진짜, 진짜, 진짜, 겁나게 무섭습니다. 숨이 막힙니다. 소리 없이 다가가서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드는 쉬거 앞에서는 협상할 수도, 설명을 요구할 수도, 삶을 구걸할 수도 없습니다. 쉬거는 우연히 찾아오는 불행 같은 존재입니다. 대적해서 물리칠 수도, 거슬리지 않게 행동할 수도 없죠. 불행은 그저 찾아오지 않게 바랄 수밖에요.

세상의 수많은 선량한 이들이 납득할 수 없는 부조리한 불행들로 인해 죽어가는 것처럼, 쉬거를 만난 자에겐 무력한 죽음뿐입니다. 이 불행의 화신은 이해할 수 없어서 더 무섭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어떤 룰에도 따르지 않습니다. 늘 자신의 원칙에 따라 자신만의 특수한 무기로 일을 해치우며, 부상을 입더라도 혼자 힘으로 해결하죠. 전에 홍대에서 술 먹고 첫차 기다리며 DVD방에 갔었는데요, 이 영화 틀어놓고 자다가 악몽을 꾸기도 했습니다. 쉬거한테 밤새 쫓겨다녔습니다. 하비에르 바르뎀의 낮은 목소리 으….


마지막 1위네요. 제가 꼽은 최고의 악당은 <폭풍 속으로>의 보디(패트릭 스웨이지)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순위겠죠. 이 영화는 지금 보면 연출도 촌스럽고 키아누 리브스를 포함한 배우들의 연기가 아주 엉망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 속 보디의 대사들은 오랜 기간 제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제 방 거울에는 “인생은 병적인 유머센스가 있다”는 이 영화의 대사가 아직도 붙어있을 정도죠. 묵묵하게 삶을 살아내려는 태도와 스스로의 판단에 대한 믿음을 길러준 영화라 말하고 싶네요.

전직 대통령 가면을 쓰고 은행을 터는 보디 일당은 돈보다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급진주의적 서퍼들인데요. 보디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이건 개의 심리와 같아. 개들은 위협하면 질질 오줌을 싸며 순응하지. 나약함을 드러내면 오히려 난폭함을 유발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죽는 거야. 두려움이 머뭇거리게 하고, 머뭇거리면 너의 두려움이 실현될 거야, 간단해. 갈등을 없애려면 강인한 모습을 드러내는 거야.”

다른 분들이 꼽는 최고의 악당은 누구일지 궁금해지네요. 매력적인 악역들의 공통점은 모두 견고한 자신의 철학이 있다는 점 같습니다. 철학적 사상이 있으면 악행은 무언가를 초월하려는 ‘운동’으로 승화되기도 하죠. 지배체제에 감히 곡괭이를 드는 그 사상에 공감하는 순간 관객은 자신도 몰래 쩍, 하고 금이 가는 짜릿한 균열의 순간을 기다리게 되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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