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천의 엔딩크레딧] 21. 눈 내리는 날엔 일본영화를
[김상천의 엔딩크레딧] 21. 눈 내리는 날엔 일본영화를
  • 김상천
  • 승인 2013.11.28 21:42
  • 호수 1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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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날엔 일본영화의 여백이 그립다

지난주 월요일 서울에 첫눈이 내렸습니다. 라고, 이렇게 사실만을 썼는데도 낭만적인 문장이 되네요. 첫눈이란 말엔 사람을 설레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심지어 부탄이라는 나라에서는 해마다 첫눈 내리는 날을 공휴일로 지정한다죠. 부탄 사람들은 좋겠어요. 올 때가 됐는데 하며 자꾸만 사무실 창밖을 바라보다가 정말로 첫눈이 오는 걸 보고 들떠서 소리치는 모습이 상상되네요.

우리도 그런 공휴일 하나쯤 있으면 좋을텐데. 매년 전력이 부족해서 난리니 ‘대한민국 정전의 날’은 어떨까요? 우리가 필요하다고 굳게 믿는 각종 전자기기들이 새까맣게 꺼져 있는 날, 그래서 효율의 법칙이 힘을 잃고 삶의 속도가 느려지는 날. 기계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연결되는 날. 전부터 그런 날이 있었으면 했어요. 그건 정전(停電)이 아니라 정전(停戰)이겠죠.

잠깐 딴소리를 하려는데요, 혹시 첫눈의 기준이 뭔지 아세요? 이게 또 골 때립니다. 각 지방별로 기상관측소가 있는 동네에 눈이 와야만 첫눈으로 인정된다네요. 강남이나 여의도에 제아무리 눈발이 휘날려봐야 서울기상관측소가 있는 종로구 송월동 1번지의 하늘이 맑으면 첫눈이 될 수 없는 것이죠. 관측소에서 직원들이 맨눈으로 볼 수 있어야 첫눈으로 인정된다죠. 어쩐지 첫눈의 기쁨을 기상관측소 직원들이 독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서 배가 아픕니다.

▲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원제는 그냥 기적(奇蹟)입니다. 제목 참 잘 뽑은 것 같죠?

매년 이맘때면 저는 꼭 일본영화를 찾아봐요. 눈 내리는 겨울엔 유독 일본영화 생각이 납니다. 여름이 동적인 계절이자 블록버스터의 계절이라면, 겨울은 정적인 계절이자 소소한 영화들을 계절이 아닐까요. 소소하고 아기자기한 매력의 일본 영화들은 왠지 극장의 대형스크린으로 보는 것보다 집에서 이불 덮고 귤 까먹으면서 봐야 더 제맛인 거 같아요. 유자차라도 한잔 있으면 최고죠.

올해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을 봤습니다. <걸어도 걸어도>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같은 작품들이죠.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일본영화를 보고 싶다는 건 일본영화의 여백을 보고 싶다는 거였구나. 일본영화 특유의 차분함과 여백들이 그리운 거였구나. 싸-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라든지, 매미 우는 파란 하늘, 눈 덮인 앞마당이나 롱테이크로 비추는 돌계단 오르는 장면들이 주는 무덤덤한 여백이야말로 일본영화의 매력인 것 같아요.

▲ <걸어도 걸어도>. 이 영화가 좋으셨다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TV드라마 <고잉마이홈>도 추천합니다. 이 제목은 그냥 '고잉홈'이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이런 무덤덤한 여백들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특히 잘 어울립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현실을 과장하지 않고 담담히 비춥니다. 기적을 찾아 떠나는 아이들의 여행이 주제라면, 여느 감독들 같으면 비현실적이고 감동적인 이벤트를 결말에 등장시키겠죠. 그런데 이 감독은 억지스럽거나 과장된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특별한 기적이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현실로 돌려보내 일상이야말로 기적임을 깨닫게 만들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은 ‘나와 먼 것들을 굳이 동경하지 않아도 된다. 평범하고 겸손한 삶 자체로도 충분히 가치있고 아름답다.’ 이런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래서 이 무덤덤한 여백들도 무척 잘 어울립니다.

나와 먼 것들에 대한 동경. 이게 바로 우리로 하여금 삶이 불행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원인이 아닌가 싶어요. 첫눈이 오면 쉰다는 부탄은 유럽 신 경제재단이 143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국가별 행복지수 1위에 꼽힌 나라라고 합니다. GDP는 2천 달러도 못 미치지만요. 부탄의 GDP에 10배가 넘는 한국은 68위였다네요. 첫눈의 감상에 젖는 일은 유치하다 여기고 밥벌이 할 때 차 막힐 걱정만 하는 나라와 첫눈이라는 소소한 축제를 즐기는 나라. 못 가진 것을 속상해하는 나라와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나라. 어느 쪽이 더 행복할지는 뻔하겠죠. 사는 게 괴로운 건 많이 갖지 못해서가 아니라 갖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인가봐요. 젠장,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 살다니… 확 부탄가스라도 마시고 싶은 심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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